전위 예술가들의 아지트, 타셰레스

[캠핑카 타고 유럽 여행 12] 독일 베를린에서3

등록 2004.02.20 15:01수정 2004.02.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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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타셰레스의 공동 작업실 일부.

타셰레스의 공동 작업실 일부. ⓒ KOKI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베를린. 그러나 부란덴부르크문을 시작으로 거리를 밝히고 있는 전구들은 주변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또 거리 중앙에는 도로 차단막을 설치하고 간이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겨울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오후 7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옛 동독 지역에 위치한 화랑 거리. 이 구역을 점령하고 있는 것들은 대개가 귀티 나는 화랑과 예술가들의 작업실. 우리식으로 치면 인사동의 예스런 분위기와 홍익대 앞의 젊음, 청담동의 고급스런 느낌이 짬뽕이 된 듯한 분위기다.


a 타셰레스 입구

타셰레스 입구 ⓒ KOKI

그런데 아뜰리에 거리에서 한 블록 뒤. 그곳에 타셰레스(Tacheles)가 있다.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큰 상처를 입었던 건물을 수리해 이용하고 있는 타셰레스는 일종의 공동 아뜰리에다. 벽이란 벽은 모두 그래피티 천지고, 건물 안에서는 작가들이 정을 찍는 소리, 그라인더를 돌리는 모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화랑 거리에서 타셰레스가 유독 돋보이는 이유는, 공동 아뜰리에인 동시에 시당국이 돈 없는 젊은 예술가들의 예술혼을 지원하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5층짜리 빌딩 안에 위치한 타셰레스는 이곳 독일의 돈 없는 예술가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독일은 물론 멀리 스페인에서도 이곳을 찾아올 정도다. 주로 전위적인 예술을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타셰레스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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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KI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듯 철 골조가 드러난 1층 로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3층부터 타셰레스가 시작된다.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계단 옆 벽들은 온통 그래피티 천지다. 강한 원색 톤을 그대로 살려 그려낸 그래피티들. 어떤 것은 통일을 이끌었던 헬무트 콜 전 독일 수상을 조롱하고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뜻 모를 독일어로 휘갈겨 놓은 문자들의 나열. 유럽에 와서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그래피티가 참 많다’는 거였는데, 타셰레스는 그 아지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피티가 많았다.


3층과 4층이 타셰레스가 들어선 공간이다. 이 공간은 20여 개의 개인작업실과 공동 작업실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로 간의 대화와 소통은 끊임없이 이뤄지지만 작업 공간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공간을 철저하게 보호받는다고 했다.

정신 없다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타셰레스. 젊은 작가들은 왜 타셰레스에 오게 된 것일까. 남자친구와 함께 지난 9월부터 이곳 타셰레스에서 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 이네스 에크를 만났다.


a 이네스 에크(오른쪽).

이네스 에크(오른쪽). ⓒ KOKI

“주변만 해도 꽤 비싼데, 여기는 비싸지 않아요. 그래서 들어오려고 경쟁이 무척 심하죠. 오랫동안 줄을 서야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예요. 저도 2년이나 걸렸어요.”

타셰레스는 베를린 시당국으로 여러 지원을 받고 있다.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재정 지원.

통일 이후 치솟는 임대료는 새 수도 베를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아뜰리에들에 비해 이곳 타셰레스에 입주한 작가들은 월 111유로, 즉 우리 돈으로 약 15만원만 내면 된다. 시당국의 재정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은 이미 동독 시절부터 그렇게,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개인 아뜰리에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동독 시절부터 유명했던 타셰레스, 소식은 어느덧 독일 국경을 넘었다. 독일 출신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타셰레스에는 비단 독일 작가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경제 사정이나 예술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구소련 하 신생 독립국이나 폴란드나 불가리아 등 동유럽 출신자도 있고 멀리 스페인에서 온 작가도 있다.

독일 중부 튀링겐주(州)에 있는 도시 예나 지역 출신인 이네스 에크의 경우에도 타셰레스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꼭 그 이유뿐만은 아니라는 것이 이네스 에크의 설명.

“제가 베를린으로 오게 된 이유는 예나보다 작업 환경도 좋고 대중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서였어요. 그 중에서 타셰레스는 유별났죠. 누가 간섭하지도 않을 뿐더러 전위적인 작가들이 많아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작업환경은 최고예요. 보면 알겠지만 다들 자기 개성이 무척 강해요. 제겐 그게 참 큰 영감을 주죠.”

a 타셰레스 안의 벼룩시장

타셰레스 안의 벼룩시장 ⓒ KOKI

그렇지만 잘 나가는 스타 작가가 아닌 바에야 예술가들 살기 힘든 것은 세계 어디든 매한가지다. 독일은 그나마 시에서 수당이 나오기는 하지만 마르크화가 유로화로 통합되면서 펄쩍 뛴 물가는 좀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들도 높은 물가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그래서 이들은 나름대로 생활 및 작업 비용 마련을 위한 방안을 생각해 냈고, 그 중 하나가 공동 작업실 일부를 ‘벼룩시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작업 틈틈이 판매용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 팔기로 한 것. 주제는 자유, 소재는 무제한. 그저 만들고 싶은 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된다. 그게 귀찮으면 자기가 쓰던 물품이나 입던 옷, 듣던 음악 씨디를 내다팔아도 된다. 어차피 그 수익은 개인 수익이니, 놀며 팔든, 열심히 팔든 결과는 자신이 감수해야 한다.

가격은 웬만한 벼룩시장에 비해 결코 싸지 않다. 부르는 게 값이니 싸게 부를 법도 하지만 가격은 대체적으로 높은 편. 사거나 말거나 신경 쓸 작가들도 아니지만, 호기심에라도 사는 사람이 제법 있어 수입은 꽤 짭짤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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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KI

이렇게 생활하면서까지 하고자 하는 예술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예술전쟁(Kunztkrieg)’이라 쓰여진 재킷을 팔고 있던 해이건 구스탁. 지난 6월에 타셰레스에 들어온 해이건 구스탁은 콜라주를 이용한 회화작업을 하는 작센 지방 출신의 작가.

“귀족적인 예술이 싫어요. 지나오면서 봤겠지만 그 화랑들 한 번 보세요. 어떤 땐 역겹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저는 특정 계층만을 위한 예술이라면 그건 이미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항상 사람들 옆에 있을 수 있는 예술, 반 발짝 앞서나가는 예술, 그런 예술을 하고 싶어요. Kunztkrieg! 예술전쟁을 한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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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KI

예전에 대학에서 조각 공부하던 것이 생각났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승희 형. 경제적인 이유로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아예 다른 일을 찾아야 했던 기억이 있는 승희 형에게, 이곳 타셰레스는 꿈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기죽을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도 차차 여건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홍익대 근처에 위치한 쌈지 스페이스는 아예 무료로 예술가들에게 아뜰리에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거기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명 외국 미술대학 졸업장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가 표현하는 것을 말 그대로 그저 표현해내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곳 사람들. 유명한 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그리파를 무진장 그려대야만 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예술을 하려고 해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곳 타셰레스는 생소한 곳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전위 예술가들의 아지트, 타셰레스가 주는 느낌이 더 강한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 이름입니다.

덧붙이는 글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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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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