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맞아 냇가로 때 벗기러 가는 밤

목욕탕 없던 산골마을의 아련한 세가지 파노라마

등록 2004.02.26 16:34수정 2004.02.2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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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신나는 일시 개학을 맞은 산골 네 마을의 작은 학교. 아침 조회시간부터 선생님 기분은 영 언짢아 보였다. 북면동국민학교 3학년 아이 서른일곱명 중 여자 아이 4명 빼곤 다같이 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려야 했다.


"똑바로 펴 이놈들아. 선생님이 뭐라 했어. 이게 까마귀지 사람 몰골이냐?"
"탁탁탁! 타닥!"
"그 다음!"

지휘봉이 사랑의 매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노란 대 뿌리를 말려서 불에 구워 나긋나긋하게 내려치는 한 대 한 대의 매는 매웠다. 뿌리 마디마디가 뼛속에 사무쳤다. 뿔 자(尺)는 오돌토돌 돋은 대 뿌리에 비교하면 따끔하고 마는데 왜 이리 아프단 말인가.

평소 숙제하지 않는다고 매를 든 적이 없었던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막바지 겨울을 나면 봄방학이 시작되므로 학년이 올라가 당신의 제자들이 새로 오신 선생님께 시골 촌놈들이라고 한 소리 들을까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타다닥! 탁탁!"
"아플 게다. 선생님은 너희들과 1년을 보냈다. 그런데 이게 뭐냐? 오늘 당장 집에서 물 데워 목욕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여러분들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이다. 알았습니까?"
"예."
"그리고 급장!"
"예."
"오늘은 청소 빨리 하고 집에 보내줘라."
"알겠습니다."

아이들 몰골을 한번 들여다볼작시면 가관이다. 늦가을 보리파종 때부터 부르트기 시작한 살갗은 나무하고, 군불 때고, 여물 썰고, 설거지에, 조리 만드느라 찢기고 부르터 있었다.

손, 발, 얼굴 가리지 않고 까무잡잡하고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쫙쫙 벌어져서 핏자국이 선명하다. 노출된 부분 못지않게 무릎과 팔꿈치, 목덜미는 말라비틀어진 시궁창에 다름 아니다. 1시간 이상 부풀려도 쉽게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때는 몇 겹인지 모른다.


궁벽한 산골 소년소녀들은 목욕탕이 있다는 것도 모르던 시절이다. 그곳도 장 마당마다 있었던 것도 아니니 목욕 한번 하려면 2시간 반을 차를 타고 광주까지 나가야 구경할 수 있었으며 설사 어른들이 알고 있다 손치더라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엄중한 때에 목욕을 하러 차비와 목욕비 등 돈을 허비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겨울방학 동안 목욕할 기회는 딱 한번이었다. 설 이틀을 남겨두고 밥솥단지와 국솥단지에 물을 가득 끓여서는 찬물 섞어서 부엌문 꼭 걸어 잠그고 한동안 불렸다가 등짝은 누이나 어머니가 밀어주고 손과 발, 앞쪽은 손수 밀어내는 게 다였으니 그렇게 깜둥이가 된 것은 당연하다.


여자 아이 네 명이 맞지 않은 건 당연했다. 평소 어머니가 잘 씻어주고 관리해준 탓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겨울이라고 방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고로 흙과 추위에 연약한 피부가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자녀가 여섯 일곱 명은 기본인지라 돌볼 틈도 없다. 어머니와 누이가 쓰는 '구루모(크림)' 하나 바를 수 없는 아이도 수두룩했다.

아이들은 겨와 여물이 섞인 소죽물을 퍼서 쫙쫙 갈라져 피가 질질 흐르는 손을 담가 지푸라기를 뭉쳐 득득 문지르는 게 다였고 양잿물로 만든 비누로 한번 씻는 건 가물에 콩 나듯 드문 일이었다.

"엄마, 누나 나오면 안돼! 엄마가 나오란 말야." 그리고 "엄마 슬슬 밀면 안되까?" 정지문 닫아 놓고 부엌에서 목욕하는 밤은 어찌 행복했던지 모릅니다.
"엄마, 누나 나오면 안돼! 엄마가 나오란 말야." 그리고 "엄마 슬슬 밀면 안되까?" 정지문 닫아 놓고 부엌에서 목욕하는 밤은 어찌 행복했던지 모릅니다.김규환
일찍 학교를 마치고 어머니께 달려갔다.

"엄마, 선상님이 목욕하고 오라그요."
"낼 허면 안 되겄냐?"
"안 되지라우. 오날 선상님께 허벌나게 맞아부렀는디요."
"그려. 많이 아팠제? 저녁 밥 묵고 엄니가 물 데워줄텡께 통에 들어가 씻어라."
"예."

그날 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장작을 메워 구정물 통이나 큼지막한 다라이에 몸을 씻었다. 아니 씻는다는 것보다는 때를 벗기는 대장정에 돌입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다는 말만 무성할 뿐 언제 이 마을을 환하게 밝혀줄 지는 이장(里長)도 모르고 면서기도 몰랐다. 어머니는 어둑해지기 전에 미리 소와 돼지먹이가 되는 구정물 통을 말끔히 씻어 놓으셨다. 물이 팔팔 끓자 정지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애오라지 아궁이 장작불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에 의지해 내가 들어갈 정도로 큰 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찬물을 부어 약간 뜨겁게 섞고는 휘휘 저어 고루 섞이게 한 다음 굵은 소금 한 줌을 풀어 넣는다.

"거시가 인자 다 됐응께 통에 들어가 있어라."
"예. 글면 이따 나오싯쇼."

손가락으로 온도를 측정하고 빤쓰(팬티)만 입고 통 안으로 들어간다. 아무리 어머니지만 이젠 부끄러움도 아는 나이다.

"으으 뜨거워. 엄니 너무 뜨겁구만이라우…."
"들어가 있으면 식응께 시방은 쬐까 뜨거워야 혀."

끓던 밥솥단지에 남은 물이 끓고 목간통에서 자꾸 만들어지는 김이 내부를 데우고 부엌문을 통과하여 펄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첨벙첨벙!"

때 벗기는 막중한 임무를 잊고 실내 수영장으로 착각했던 나는 몇 번이고 발과 손을 굴려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물이 넘쳐 아궁이 속으로 물이 흘러넘친다.

"막둥아 얼른 때 벗기지 않고 뭐혀?"
"누나?"
"등짝은 누나가 밀어줄텡께 얼른 불려야지…. 장난 그만하고."
"알았어. 쉽게 불어야 말이지. 글고 누나가 나오지 말고 엄마 오시라 그래."
"알았어야."

누이는 나를 업어서 키웠다. 누이는 멀리 일 나간 어머니대신 포대기에 업고, 하루 두 세번을 왕복하여 젖을 먹이고는 잠재우고, 끓인 밥을 떠 먹여서 나를 보살폈다. 하지만 이제 그만한 나이가 되자 누나에게 도저히 부끄러워 내 치부를 드러내 보일 수 없어 팬티를 입고 들어갔지만 정지로 들어오는 걸 거부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손, 발, 목덜미, 무릎, 정강이, 장딴지, 팔꿈치를 손바닥으로 살며시 밀자 쑥쑥 밀려나오는 보리쌀만한 때가 한 줌씩 기분 좋게 잡힌다. 이왕지사 목욕하는 것 몇 그릇이 될지 모르지만 제대로 밀려 나와야 본래 임무에 충실한 것이니 맘 상할 일 아니다.

어렴풋한 불빛에도 동동주 위에 뜬 밥 알 크기나 되는 때 알이 한층 자욱하게 퍼져 있다.

"엄마아~"
"알았어. 곧 나갈 것이구만."

사르마 조각을 꺼내와 등짝을 피가 터지도록 밀어대는 어머니 손길에 살살 문지르라고 한마디하지 못하고 때 벗기는 일은 끝이 났다. 차츰 부엌 안 온도가 내려갔다. 덜덜덜 떨며 미지근해진 솥에서 물을 한바가지 퍼서 끼얹고 방으로 직행했다.

일단 보온을 하고 나서 때 국물을 바깥 장독대 근처 물 잘 빠지는 곳에 대다 버려야 한다. 오랜만에 목욕을 해서인지 방안에 있던 메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머니는 속옷과 내복을 새 걸로 개서 이불 속에 넣어 데워 놓으셨다. 내복과 머릿속에 꼼지락꼼지락 득실거리던 이마저 꿈틀대지 않았다. 그 상쾌함을 어찌 표현할까.

그 다음날부터 며칠간 선생님께서는 용의 검사를 실시했다. 일주일여 봄방학 기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과 교실만 바뀌고 동무 두 명이 서울로 전학 간 일 빼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깐깐해 보이는 연로하신 선생님이 담임으로 왔다. 그새 며칠이나 지났으므로 벌써 아이들은 숯검댕이가 되었다. 도시 아이들을 가르치다 근무 평점을 훨씬 더 많이 받기 때문에 산간벽지에 오신 선생님 눈에 비친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그 눈을 아직 잊지 못한다.

"급장, 여기는 목욕탕 없냐?"
"예? 시방 뭐시라고 했어라우?"
"응 응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어봤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보배입니다. 어린이는 언제나 청결해야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해서 공부도 잘하고 장차 커서 수출 잘 하는 나라로 만들 훌륭한 인재입니다. 내 말 알아들었죠?"

새로 오신 선생님은 ‘몸을 잘 씻자’는 말씀까지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분위기로 보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4학년 학생들은 뭔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3월 초 으쓱한 밤 도랑에서 팔뚝, 무릎, 정강이, 손등, 발등, 목덜미를 물 속에서 주은 돌멩이로 득득 문질러 때를 벗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본 그 친구들 피부는 아무렇지 않았답니다.
3월 초 으쓱한 밤 도랑에서 팔뚝, 무릎, 정강이, 손등, 발등, 목덜미를 물 속에서 주은 돌멩이로 득득 문질러 때를 벗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본 그 친구들 피부는 아무렇지 않았답니다.김규환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던 양지마을 사내아이들은 퇴비자리가 있던 신작로 귀퉁이에 모여 책보를 깔고 앉았다.

"야, 뭐 좋은 생각 없냐?"
"너는?"
"뾰족한 수가 있겠냐. 그냥 오늘 밤 냇가로 가서 때 벗기는 수밖에."
"아직은 수월찮게 추울 것인디…."
"글도 방법이 없잖냐? 긍께 저녁밥 묵고 일곱 시 까장 수건 준비해 갖고 나와라. 알았제?"
"잉."

각자 수건 하나 빼곤 아무 것도 손에 들린 게 없었다. 일곱 아이는 밤길을 신작로를 따라 다시 학교 앞을 거쳐 깨끗한 이웃 동네 도랑이 있는 학교 보에 도착할 때까지 마구 뛰었다. 물안개가 활활 피어오르고 있었다.

"원메 그래도 허벌나게 춥겄는디…."
"싸게싸게 벗고 들어가자. 여기 있어봤자 더 춥당께. 울 아부지는 야학 댕기실 때 한 겨울에도 얼음장에 들어가 새벽에 몸을 씻고 공부하셨다고 글더라."

"머리 어깨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발!" 국민체조 전신인 '신세기체조'까지 할 필요도 없이 몇 번 몸을 움직이고는 훌러덩 벗고 몇 방울 찍어 바르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으드드드" 이를 부딪히며 떠는 아이, "으~" 덜덜 떨며 가슴을 웅크리며 살을 비비는 아이. "어어~" 소리만 연신 질러댈 뿐 아무 말 하지 않는 아이. 꼼짝 않고 서 있는 아이.

"야 거시기 마저 탱탱 얼어 붙겠다야."
"긍께 우리 아예 멱감고 물싸움이나 한판 하자."

난데없이 아이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1978년 해발 300m 산골짜기 냇가에서 밤 여덟 시 무렵 벌어진 수영대회. 당시 아이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 판은 30여 분 간 이어졌다.

이어 잠수를 하여 밑바닥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건져 올린 아이들은 보이는 곳만을 골라 상위는 물에 잠긴 채 밀었고, 하위는 널찍한 바위 위에 올라 때를 벗겨 나갔다. 하얀 뜨물 같은 때 국물이 흐르자 민물고기 떼들마저 잠자지 않고 몰려들어 살갗을 뜯어먹었다.

아이들이 담그고 있던 물 주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덧붙이는 글 | 1. 이 내용은 MBC 라디오 <변창립의 세상속으로> 프로에 다음주 화요일인 3월 2일 소개될 예정입니다. 매주 화요일 11시 10분 저와 만나십시오.

2. 삽화를 그린 김용철씨는 <강아지를 부탁해> <공포탈출일기> <앗싸! 똥파리> <느낌표> <아이러브햄스터> 등의 만화를 그린 현직 작가입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cafe.daum.net/hongaclub )>의 열혈 회원입니다. ecomics.hihome.com에 가시면 만나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1. 이 내용은 MBC 라디오 <변창립의 세상속으로> 프로에 다음주 화요일인 3월 2일 소개될 예정입니다. 매주 화요일 11시 10분 저와 만나십시오.

2. 삽화를 그린 김용철씨는 <강아지를 부탁해> <공포탈출일기> <앗싸! 똥파리> <느낌표> <아이러브햄스터> 등의 만화를 그린 현직 작가입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cafe.daum.net/hongaclub )>의 열혈 회원입니다. ecomics.hihome.com에 가시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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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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