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정든 학교를 떠나며... 안녕! 제자들이여

[살맛나는 열린 세상을 위하여 17] 내가 덮어두고 싶었던 기억들

등록 2004.02.29 12:49수정 2004.02.2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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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산중 제자 진천규 군과 함께(LA 공항에서)

오산중 제자 진천규 군과 함께(LA 공항에서) ⓒ 박도

2004년 2월 29일, 오늘은 예년과는 달리 4년마다 덤으로 생긴 날이다. 나에게는 교사로서 마지막 날이다. 1971년 7월 12일 교단에 선 이래 꼭 32년8개월 만에 현직을 떠나는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난 내 생애의 대부분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냈다. 1952년 4월 구미초등학교(당시는 구미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구미중학교, 중동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7년(고교 4년) 동안은 배우는 처지로 학교에 다녔고, 그후 2년4개월의 군복무를 마친 후 열흘 만에 교단에 선 이래 오늘까지는 가르치는 신분으로 학교에 다녔으니 50년의 세월이다.

이제 정년을 5년 앞두고 내 자의로 학교를 떠나는 마음은 담담하다. 지난 교단생활을 돌이키면 참 잘 버텨왔다는 안도감과 교사로서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반반이다.

지금 내 머리에는 수많은 제자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첫 담임을 맡았던 1972년 3월 1일을 잊을 수 없다. 오산중학교에서는 그날이 공휴일임에도 유독 3.1절 기념식과 아울러 개학식 입학식을 모두 치렀는데, 그날 나는 1학년 12반 담임교사로 반 학생들과 처음으로 상견례를 했다.

꽃샘추위로 쌀쌀한 날씨이지만 운동장에는 새 교복을 입은 신입생과 학부모님들로 가득 찼다. 12반 팻말 앞에 2열로 늘어선 신입생들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한 녀석 한 녀석 껴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도 낮에 본 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 신입생 학급대항 축구전의 막이 올랐다. 내가 총감독이 되어 선수선발에서 경기 중 작전지시까지 내렸다. 마침내 우리반이 감격의 우승을 누렸다. 우승의 순간 고사리들이 달려들어서 헹가레를 쳐주었다.


나는 그들과 계속 진급하면서 3년을 보내고 꼭 서고 싶었던 모교 중동고교로 갔다. 하지만 1년 만에 다시 오산중학교로 부임했다.

그때의 얘기는 잊어버리고 싶다. 언젠가 학교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쓸 기회가 되면 자세하게 쓰고도 싶지만, 그대로 덮어두고 싶은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오산중학교로 다시 온지 6개월 만에 이대부중으로, 6개월 만에 이대부고로 와서 오늘까지 지냈다.


a 이대부고 22기 신민철 군과 함께(뉴욕에서)

이대부고 22기 신민철 군과 함께(뉴욕에서) ⓒ 박도

오산에서 이대부중으로 옮겨갈 때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으로 20년만 버티자고 결심했는데 그 탓인지 27년을 지냈다. 몇 번은 교단생활이 위선이요 삐에로 같아서 차라리 남대문시장에서 박수치는 장사꾼이나 흙을 뒤집는 농사꾼이 되려고 사표를 던지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극구 말렸다.

"교사는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

그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사표를 쓰고 싶을 때마다 그 말씀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용렬하고 참을성 없는 내가 33년을 버틴 것은 아버지의 말씀 덕분이었다.

퇴임을 앞둔 이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젊은 날에는 실수도 많았고 잘못 가르친 것도 많았다. 하지만 제자들만큼은 그때의 녀석들이 바로 어제처럼 더 기억에 생생하고 그립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어디에도 통하는 진리다. 그때는 순수했고 열정적으로 그들을 사랑했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그들은 여태 나를 찾아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녀석이 한밤중에 직장에서 잘렸다고 울먹이며 서울역 대합실에서 전화를 했다. 죽고 싶다는 것을 간곡히 달래서 귀가를 시켰다.

때때로 나는 그들이 보고 싶으면 사진첩을 꺼내놓고 그때의 녀석들을 보면서 중년이 되었을 그들을 상상하다가 수화기도 들곤 한다.

점차 세월이 흐를수록 교단생활이 삭막해지기 시작하였다. 보충수업, 자율학습, 이런 게 극성을 부린 후부터는 수업에 감독에 지쳐서 솔직히 학생들과 면담조차도 귀찮아졌다.

'타율학습'을 시키면서도 '자율학습'이라고 우기는 교육, 몽둥이 들고서 밤 10시까지 환히 불 켜진 교실을 지킬 때,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나도 모르게 보충수업 자율학습 수당을 챙기는 찌든 교사가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학생이 방과 후 도서실이나 교실에 남아 공부하는데 돈을 받는 나라는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꼭 돈에 걸신들린 나라 같다. 이런 꼴을 보다못해 일부 가정에서는 자녀를 어려서부터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있다.

a 이대부고 24기 김영미 가족과 함께(필라델피아에서)

이대부고 24기 김영미 가족과 함께(필라델피아에서) ⓒ 박도

우리나라는 변칙에 너무 익숙해 있다. 변칙이 원칙이 되고 원칙이 변칙이 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급학교 입학성적이 좋은 학교일수록 변칙 교육을 더 많이 한 학교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변칙으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자 별별 해괴한 부정을 다 저지른다. 교육을 바로 하지 않는 한 이 나라 이 사회에 아무리 부정부패 일소나 개혁을 부르짖어도 말짱 도루묵일 것이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한 평교사가 교단에서 소신을 펼 수도 없었고, 전체 분위기는 늘 천박한 자본주의식 교육으로 흘렀다. 오염된 대기에 사는 이는 그 누구도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얘기로 나의 면책을 구하기에는 내 지난 삶이 너무 비겁했다.

지난해 겨울 일본 아오모리 현 오이라세 계곡을 기행하면서 고목이 시내를 가로지른 채 쓰러져서 뭇 짐승과 벌레들의 다리가 되는 걸 보고서 나도 남은 삶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퇴임 후 산골로 돌아가서 나무를 해서 군불 지핀 후 낮잠도 자고, 때로는 컴퓨터 자판도 두들기면서 못다 한 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거나, 그 일이 지루하면 힘없고 가난하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억울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방곡곡 찾아다니면서 때로는 기사로 때로는 수필이나 소설로 창작해서 나를 기억해준 분들에게 바치면서 살아가련다.

그동안 교단에서 나의 언행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은 제자들이 있다면 사죄드린다. 안녕! 학교여, 그리고 제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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