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하는 가수

마음과 목소리의 만남, 가수 이용복씨를 만나고

등록 2004.03.01 16:51수정 2004.03.0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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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수 이용복(왼쪽)씨와 필자

가수 이용복(왼쪽)씨와 필자 ⓒ 이효연

1973년 서울의 한 가정집 안방

아버지가 신형 녹음기를 새로 사 오신 기념으로 시험차 온 가족이 둘러앉아 녹음기를 켜 놓고 '이효연 재롱잔치'를 마련합니다.


4살짜리 꼬마는 어른들의 '잘한다', '최고다'의 추임새에 마냥 들떠서 비록 혀짧은 소리지만 아는 노래들을 모두 불러제낍니다. 동요에서 트로트까지….

'띤구(친구)여 띤구여 어디에 있느냐 또띡(소식)을 떤해다오(전해다오)'

이 노래는 이용복의 '친구'라는 곡으로, 마침 가사도우미 언니가 아이를 늘 등에 업고 다니며 흥얼대던 곡이라 아이는 제법 표정연기까지 해가며 자신있게 이 노래를 소화해냅니다.

1999년 CBS 3층 FM 주조정실

26년 전 이용복의 '친구'를 거침없이 불러제끼던 그 꼬마는 어느덧 훌쩍 커버려 올드팝 프로그램 <저녁스케치 939>의 DJ로서 마이크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DJ는 다른 곡 소개 때와는 달리 안드레아 보첼리, 호세 펠리치아노 등 앞을 보지 못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소개할 때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멘트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가수들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더 깊이 더 많이 바라볼 겁니다. 그래서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우리의 귀에 전해지기에 앞서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테니까 말이죠."


물론 이용복씨가 부른 번안가요 등을 소개하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2004년 2월의 어느날 CBS 3층 대기실 ('행복을 찾습니다' 방송 전)

a 가수 이용복씨

가수 이용복씨 ⓒ 이효연

오늘 '행복을 찾습니다' 행복초대석 초대손님은 가수 이용복씨입니다. 어릴적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재롱을 부렸던 꼬마가 이번에는 방송 진행자로서 가수 이용복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DJ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의 노래만을 소개하던 것과는 또 다른 만남입니다. 방송 시작 전 명함 한 장을 챙겨들고 대기실로 향하면서 '점자 명함'을 만들어두지 못한 사실에 미안함을 가져봅니다.

"안녕하세요? 이용복 선생님. 전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MC 이효연입니다. 오늘 방송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이용복씨는 몇 마디 제 인삿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혹시 몇 년 전 '저녁스케치 939'를 진행했던 그 분 아니세요? 이…아무개라는…."

"어머나!!!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나요?"

아! 그는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제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뛸 듯이 기쁘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뭉클한 것은 이용복씨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름 석자가 아닌 제 목소리란 사실이었습니다. 시력이 약한 분들은 대신 청각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용복씨도 아마 그런 이유로 제 목소리를 기억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32년 전 4살 꼬마의 애창곡이었던 '친구'는 이용복씨의 기타연주가 곁들여진 라이브 곡으로 방송 전파를 타고 흘러나갑니다. 바로 옆에서 라이브로 그 노래를 듣는 MC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가수의 노래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었던 DJ, 그리고
이름 석자가 아닌 '목소리'로 DJ를 기억하는 가수의 만남은
그날 그렇게 행복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마음으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해주신 가수 이용복씨와의 만남은 '세상에서 뜻깊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값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의 만남은 설령 제가 4천만이 알아주는 '유명 방송인'이 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에는 견줄 수 없는 깊은 감동과 기쁨으로 제 가슴 한켠에 오래 자리할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방송 MC 이효연의 행복일기 
http://blog.empas.com/lhylhy365
(CBS 라디오 '고도원,이효연의 행복을 찾습니다'진행 MC)

덧붙이는 글 방송 MC 이효연의 행복일기 
http://blog.empas.com/lhylhy365
(CBS 라디오 '고도원,이효연의 행복을 찾습니다'진행 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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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방송에 홀릭했던 공중파 아나운서. 지금은 클래식 콘서트가 있는 와인 바 주인. 작은 실내악 콘서트, 와인 클래스, 소셜 다이닝 등 일 만드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직접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고 피아노와 베이스 듀오 연주를 하며 고객과 공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질 때의 행복이 정말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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