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전설적 포크 명반, 30년만에 복권

포크 기타리스트 김의철의 <김의철 노래모음>

등록 2004.03.08 09:32수정 2004.03.0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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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명...편집자 주)’라는 독재자가 있었다. 네로 황제처럼 다카키 마사오도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겼다. 그래서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를 전 국민이 반강제로 부르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들려오는 “새마을 노래”라는 곡이 그것이다.

이 곡을 비롯해 다카키 마사오가 만든 노래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국민적 단합을 고취하는 힘찬 선율과 가사로 된 노래들이라는 점이다. 반대로, 마약쟁이들이나 보헤미안이나 히피들이 부르는 맥빠지는 청춘 송가는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잘 살아보려는 시점에서, 개미처럼 일하려는 의욕을 꺾는 허무주의적인 노래는 용납될 수 없었다. 적어도, 다카키 마사오에게는 그랬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미학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총칼을 차고 진군하며 부르는 힘찬 노래들에 익숙한 다카키 마사오에게는 듣는 이를 우울하고 염세적으로 만드는 음악을 이해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치 난생 처음 기마병을 보고 ‘켄타로우스’라는 괴물로 받아들인 그리스 사람들처럼….

a 포크 기타리스트 김의철의 <김의철 노래모음>

포크 기타리스트 김의철의 <김의철 노래모음>

그러한 몰이해는 수많은 희생양을 낳았다. 포크 기타리스트 김의철의 유일한 발매 음반인 <김의철 노래모음> 또한 그러한 희생양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다.

<김의철 노래모음>은 금지곡인 “섬아이”가 실린 음반으로, 문제가 된 곡을 음반사 사장이 멋대로 수정해서 발매하려고 하자 가수 본인이 전량을 폐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된 금지곡 “섬아이”는 정상적인 미감을 지닌 사람에게는 구슬프고 암울한 정서가 짙게 드리운 노래로 여겨질 것이다.

객원 보컬 박찬응이 감기가 걸린 상태에서 녹음한 이 곡은 가사뿐만 아니라 클라리넷과 기타가 만들어내는 황량한 무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퇴폐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데 금지곡이 된 이유는, 엉뚱하게도 ‘창법 미숙’이었다. 인간 어두운 내면의 정수를 들려주는 이 곡이 다카키 마사오 군단의 귀에는 ‘미숙’한 노래로 들렸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의 귀에는 미숙하게 들렸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김의철 노래모음>은 1970년대 한국 포크의 전설적인 명반임에 틀림없다. 우선 주목할 것은 이 음반의 단순한 악기 구성이다.

TV를 주름잡는 포크 엔터테이너들(송창식, 서유석 등)의 음악이 날로 화려한 치장을 자랑했던 것과 달리, 김의철의 음반은 어쿠스틱 기타, 그도 아니면 클래식 기타와 보컬로만 이루어진 심플한 구성을 취한다. 여기에 간혹 클라리넷이나 이정선의 베이스 기타가 첨가되는데, 이조차도 당시 이름을 날리던 유명 연주인이 아닌 김의철의 누나나 친구들이 연주를 맡았다.


이 사실은 김의철의 비상업적인 음악하는 자세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사운드 측면에서도 눈여겨볼 점이 존재한다. 안건마와 같은 당대 편곡자들이 만들어낸 인기 포크 음악의 풍부한 리듬감에 비해, 김의철의 음악은 전혀 리듬감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 음악은 그저 기타와 처연한 노래 소리를 따라 강물처럼 흘러갈 뿐이다. 결국 청자는 곡의 선율과 메시지에 집중하게 되며, 한두 대의 기타가 만들어내는 단촐함과 서정성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김의철이 선보이는 다채롭고 능란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이다. 김의철은 손에 통기타 한 대만 들고도 어떻게 듣는 이를 휘어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교정”에서 구사하는 닐 영(Neil Young)풍의 쓰리 핑거 주법과 스트러밍, “우리의 꽃”에서 들려주는 트레몰로 주법, 음반 전체의 주요한 특징을 이루는 잡아뜯는 주법 등이 그 예이다.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강물”과 같은 곡에서 선보이는 클래식 기타 연주와 박찬응의 보컬의 조화는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클레오 레인(Cleo Laine)의 조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이 곡의 다채로운 리듬의 변화와 화성 운용은 이후 김의철의 클래식으로의 전향을 예시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뛰어난 음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김의철 노래모음>은 1974년 판금 조처로 인해 사장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긴급조치가 떨어진 하수상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다카키 마사오가 까라면 까는 것이고 창법 미숙이라면 창법 미숙인 것이지 다른 판단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무려 30년의 세월 동안, 김의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음반은 몇몇 수집가들 사이에만 전해지며 ‘비운의 명반’으로 알려져야만 했다.

판금 조처 이후 정확히 30년만에 재발매된 <김의철 노래모음>을 듣는 심정은, 그래서 특별하다. 이는 오랜 해외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포크 뮤지션들과 작업하고 있는 김의철을 보는 심정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의철 노래모음>은, 과거의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미개하고 비정상적인 폭력적 국가였는지를 알려준다. 그에 더하여 이 음반은 다카키 마사오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한 -다시 말해 “섬아이”을 듣고서 슬픔을 아름다움의 경지에 끌어올린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스스로의 미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대한민국은 조금씩 새로워지고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아니, 새로워진다기보다는 그나마 정상에 가까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덧붙이는 글 | * 학계에서는 "새마을 노래"가 황철익의 곡이라는 견해도 있다.

덧붙이는 글 * 학계에서는 "새마을 노래"가 황철익의 곡이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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