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불법대선자금을 수사해온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서초동 대검찰청 15층 소회의실에서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전 검사직을 걸고 사즉생의 각오로 수사하겠습니다. 총장님은 최소한 불법대선자금에 대해 수사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표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지난 2003년 10월 말,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대검찰청 8층 송광수 검찰총장실에 찾아가 송 총장에게 건넨 말이다. 안 중수부장은 결국 송 총장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며칠 뒤 검찰은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확대를 선언했다. 48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검찰이 대선자금이라는 '성역'에 대한 수사. 그것도 집권 1년째인 현직대통령도 직접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권의 압박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간접적이지만 검찰에 오히려 더 압박이 될 수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경제상황이었다. 대기업이 주요 수사대상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 중수부장은 모든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검찰총장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사전에 송광수 총장의 약속을 얻어낸 것이었다.
이들의 우려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특검'과 '검찰 편파수사에 대한 국회청문회'로 나타났다.
검찰은 11월 3일 김종빈 대검차장이 주재한 서초동의 한 고깃집의 점심 기자간담회에서 "국가혼란과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이 시점에서 부패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수사확대의 우려를 압도한다고 판단했다"며 전면수사확대를 선언했다.
지난해 4월 금감원에 SK계열사 조사 의뢰가 대선자금 수사 계기
이렇게 시작된 '전면적인 불법대선자금 수사'의 단초는 사실 2003년 초 서울지검 형사9부(부장 이인규, 뒤에 금융조사부로 개편)의 SK그룹 부당내부 거래와 비자금 조성 등에 대한 수사였다. 그해 2월 중순 검찰은 SK그룹의 오너인 최태원 회장 집무실과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전격압수수색을 벌여 최 회장 등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중요자료를 확보했다.
당시 검찰이 SK그룹의 비자금 사용내역서를 입수한 것이 불법대선자금 수사확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 검찰주변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인규 원주지청장은 기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게 지난해 초 SK수사의 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형사9부가 당시 벤처기업들에 대한 수사를 많이 했으나 기자들이 이에 대해 "큰 업체들은 못 건드리고 잔챙이만 터느냐"고 비웃음을 보냈다는 것. 이 청장은 '할 수 있다는 걸 한 번 보여주마'라는 생각에서 5대 기업 정도에 대해 대략적인 수준에서나마 문제점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대검 중수부가 본격적으로 SK그룹의 비자금과 대선자금 수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당시 중수부는 SK의 계열사였던 (주)아상에 대한 부당지원 혐의를 포착하고 금융감독원에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를 벌인 금감원은 그해 8월 대검에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이 맡고 있던 (주)SK해운의 아상에 대한 부당지원 혐의를 고발해왔다. 금감원이 고발해 수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검찰이 먼저 금감원에 조사를 의뢰했던 것이다.
중수부의 SK그룹 비자금 수사는 지난해 8월 29일자 <한겨레>의 'SK비자금 정치권 유입 수사 검찰, 손길승 회장 등 4-5명 출국금지‥관련정치인 곧 소환' 기사를 통해 공개됐다.
이어 10월 4일 검찰은 손길승 전 회장으로부터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게 대선자금으로 100억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에 앞서 이상수 의원에과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도 각각 30억원과 11억원을 건넸다는 진술도 얻어냈다.
10월 7일 검찰은 이들을 소환조사하겠다고 공개했다. 당초 공개시점은 며칠 뒤였으나 주간지인 <일요신문>이 이날 "최도술씨에 대해 출국금지가 내려져 있으며, SK비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함에 따라 발표시점을 앞당긴 것이었다.
최씨는 10월 16일 새벽 구속됐다. 바로 그날 안 중수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자금을 빙자해서 축재하고, 외국에 집 사고 하는 것은 가만히 놔둘 수 없는 것 아니냐. 어느 의원은 무슨 빌딩 가지고 있더라는 얘기를 많이 듣지 않느냐."
정치인들의 자금 유용을 질타한 안 중수부장의 발언은 결과적으로 불법자금 수사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