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꽃인가? 깨달음의 의미인가?

나그네 옷소매를 붙잡는 월정사의 봄

등록 2004.03.10 17:12수정 2004.03.1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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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대기 앞에서 겨우내 닫혀있던 자동차의 창문을 열어 보았다. 자동차의 창문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차안으로 밀려왔다.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바라보는 세상은 봄바람만큼이나 변덕스럽다. 아직 잔설이 가득한 한라산 산등성이에는 겨울이 한창인데도, 도심의 담장 안에는 벌써 봄의 화신이 무르익고 있으니 말이다.


a 매화속의 불상

매화속의 불상 ⓒ 김강임

오고 가며 지나치는 길모퉁이. 항상 익숙한 길모퉁이에서 느끼는 봄은 또 하나의 깨달음을 낳는다. 그리고 그 길모퉁이 사찰에서 피어오르는 봄의 화신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았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마음은 머물고 싶은데도 발길이 따라 주지 않으니, 세상살이 가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감귤농원의 가지치기부터 시작된 봄은 월정사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제주시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월정사. 사찰에서 피어나는 하늘 꽃의 의미를 새겨 보자.

차에서 내리자마자 올망졸망 피어 있는 매화를 따라 성급히 다가간다. 사찰에서 만나는 만물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또 하나의 의미. 꽃 한 송이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a 나그네의 옷소매를 붙잡는 ...

나그네의 옷소매를 붙잡는 ... ⓒ 김강임

그러나 꽃향기 그윽한 절 한가운데 서 있으면 그 꽃은 마치 하늘 꽃처럼 여겨진다. 꽃 한 송이에 부처님의 가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불자의 착각일까? 수많은 일상을 착각 속에 살면서도 적당히 의미를 붙여 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월정사 입구에 들어서니, 하얗다 못해 희디흰 매화가 내 옷소매를 붙들었다. 이파리도 없이 피어나는 꽃의 진통을 우리 중생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a 소망을 담아

소망을 담아 ⓒ 김강임

월정사 입구에 달아 놓은 등을 보니, 무엇인가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소망이 불꽃처럼 튀긴다.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절에만 가면 늘 나 자신을 낮출 수 있어서 좋다. 한 순간 만이라도 겸허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이보다 더한 깨달음이 어디 있겠는가?


a 부도와 매화

부도와 매화 ⓒ 김강임

환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월정사 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생애를 암시해 주는 부도였다. 매화 속에 잠겨 있는 부도를 보니, 살아생전 자신의 몸을 태웠을 삶의 흔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a 월정사의 탑

월정사의 탑 ⓒ 김강임

또 하나, 월정사의 대웅전을 수호신처럼 지치고 있는 것은 월정사에 자리잡고 있는 5층탑이었다. 사람들은 월정사 하면 강원도에 있는 '월정사 9층 석탑'을 연상한다. 그러나 제주시에 자리 잡고 있는 월정사의 석탑도 불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탑 아래 앉아 있는 수도승을 보니 갑자기 고개가 숙여졌다.

대낮인데도 월정사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염불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아마 49재가 있는 날인가 보다. 언젠가 들었던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찰에서는 비록 전생에서 모르는 사람이지만 제사가 있을 때는 꼭 기도를 해 주라"는 말을 기억하며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a 하늘의 꽃일까?

하늘의 꽃일까? ⓒ 김강임

월정사 마당 한 켠에 피어 있는 봄꽃으로는 역시 매화가 가장 화려했다. 아니 화려하다기보다는 하늘 꽃처럼 그 은은함이 퍼져왔다.

a 어머니가 떠놓은 정한수처럼

어머니가 떠놓은 정한수처럼 ⓒ 김강임

사찰에서 보는 모든 만물은 어느 것 하나에도 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돌, 나무, 꽃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국. 마당 한가운데 놓여있는 이름 없는 돌에도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껴질 때가 있다. 더구나 돌 안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새벽마다 어머니가 떠놓은 '정한수'의 정성만큼이나 맑고 고요한 물이다.

a 돌틈에 피어나는 꽃처럼

돌틈에 피어나는 꽃처럼 ⓒ 김강임

지난겨울의 한파에도 돌을 비집고 다시 태어난 수선화. 돌 틈에 피어나는 꽃에서 희망이 묻어났다.

월정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목련이었다. 이제 막 속살을 드러내고 세상 속으로 잉태하려는 목련. 잎이 없이 홀로 피어나는 꽃잎의 진통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순간이다.

a 이파리도 없이 속살을 드러내는

이파리도 없이 속살을 드러내는 ⓒ 김강임

'전생에 수많은 인연으로 만났었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절에서 만나는 꽃과의 인연 또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가 말했든가 '범종은 하늘 꽃으로 내리는 깨달음의 소리'라고.

저마다의 의미를 담고 피어있는 봄꽃들. 문밖으로 나가면 바로 중생들이 사는 세상인데, 절 안에 피어 있는 봄꽃들은 왜 이리도 청초한지.

a 깨달음의 소리인가?

깨달음의 소리인가? ⓒ 김강임

범종의 소리가 하늘 꽃으로 깨달음의 소리를 안겨 주듯이, 절 집의 담장 안에 피어 있는 봄꽃의 향기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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