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아 2집 [유리가면]
라틴 아메리카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탱고(Tango)가 아르헨티나 유곽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즉 손님을 끌기 위해 포주가 창녀와 추던 춤곡에서 시작된 것이다. 포주는 자신의 소유물인 창녀를 마음껏 손아귀에 쥐고 뒤흔든다. 창녀는 사내에게서 도망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 나쁜 남자를 증오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미노스 왕의 미로에 갇힌 포로처럼, 여인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지배-피지배의 관계는 남녀가 결합할 듯하면서도 멀어지고 멀어질 듯하면서도 다시 합쳐지는 탱고의 춤사위에서 잘 드러난다. 춤을 추면서 서로 마주보고 있지만 접촉하지 않으며, 둘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감이 시종 오고간다.
유럽에서 전래된 두 박자 춤곡과 아프리카 리듬이 결합한 이 댄스 음악의 비장하고 음울한 색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탱고의 어두운 선율과 숨가쁜 리듬 역시도 마찬가지다. 반도네온이 스타카토 주법으로 구슬픈 선율을 쏟아낼 때, 반대로 그것이 수반하는 리듬은 격하고 열정적이다. 이질적인 선율과 리듬의 묘한 조우를 통해, 남녀의 부조리한 관계가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 탱고는 이런 음악이다.
김윤아의 2집 <유리 가면>이 탱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사실은 놀랄 일은 아니다. 이미 솔로 1집 <섀도 오브 유어 스마일 Shadow of Your Smile>에서도 방준석과 함께 '탱고 오브 2(Tango of 2)'라는 듀엣곡을 선보인 적이 있으니 말이다.
'탱고 오브 2(Tango of 2)'는 듀엣이라는 형식을 통해 남녀 관계의 소통 불가능에 대해 효과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곡이기도 했다. 또 자우림과 솔로 음반의 음악을 통해 나름의 여성주의를 표방한 그녀이기에, 탱고 음악을 통해 새로이 뭔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생소하지만은 않다.
탱고는 잘못하면 신파가 되지만 정통으로 구사하면 훌륭한 성 정치의 매체가 될 수 있는 음악이다. 게다가 요요마의 프로듀서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 영화음악가 호르헤 칼란드렐리까지 편곡자로 대동했으니, 아무래도 2집의 요점은 탱고에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음반의 탱고는 불온한 사랑 노래로 기능을 다한다. 정통적 아르젠틴 탱고 풍의 반도네온이 꿈틀거리는 가운데 '그는 더운 가슴도 찬란한 청춘도 소모해 버리고/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라고 읊조리는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가 이를 대변한다.
심란한 반도네온 연주가 충분한 독백의 무대를 만들어줌에도 불구하고, 김윤아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사랑은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게 전부다. 바이올린과 반도네온이 제각기 스타카토와 레가토 주법으로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김윤아는 '죄의식과 행복의 기묘한 일체', '소진할 열정의 달콤한 폭주', '뜨겁고 농염한 나의 입맞춤'과 같은 한껏 탐미적인 시어를 구사하며 흡사 수사나 리날디(아르헨티나의 탱고 디바)처럼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래는 단지 자우림 시절의 '새'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탱고 버전에 불과할 뿐이다. 음악 자체의 매끈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탱고라는 음악의 특성 자체는 조금도 활용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이 음반의 거의 유일한,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탱고 두 곡을 제외하면, 그 외의 노래들은 지금껏 김윤아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난 완성도와 완결성을 자랑한다. 흡사 연극의 모놀로그처럼 들리는, 실제로 독일 영화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제목을 따 온 첫 곡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비롯해, "야상곡", "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울증)", "봄이 오면 G"와 같은 곡들이 모두 훌륭하다.
특히 톰 조빔의 아이디어를 채용한 "멜랑콜리아"와 서정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은근한 광기를 머금고 있는 "봄이 오면 G"와 같은 곡들은, 1집의 토리 에이모스 흉내를 훨씬 뛰어넘는 것들이다.
국내 여가수 가운데는 단연 정상급에 속할 김윤아의 노련한 보컬 또한 위력적이다. 다른 곡 들어볼 필요도 없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하나만으로 설명이 충분할 것이다. 이 곡에서 김윤아는 윤심덕과 에디트 피아프의 중간께에서 노래한다. 음색의 미묘한 변화, 감정 표현, 가성의 활용 등 김윤아의 노래는 그 하나만으로도 압도적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유리 가면]의 노래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음습하며, 남녀 애정 관계에서의 내핍과 증오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살부(殺夫)의 의지로 치환한 "증오는 나의 힘" 같은 곡은 극단적으로 어둡다.
자우림 시절부터 간헐적으로 내비치기는 했지만, 이번 음반에서는 유사한 어둠의 정서가 아예 음반 전체를 휘감고 있다. 한창 연애중인 그녀의 어디에서 이런 감정이 배어나오는 것일까. 어쩌면 김윤아는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정체성과 태생적인 슬픔을 단순히 극단적인 이미지를 통해 표출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 음반 역시도 매스미디어로부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여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탐구가 수반되는 것 같지는 않다. 탱고 음악이 한낱 부서진 사랑의 송가로나 쓰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긴, 연예인과 음악인 사이에 놓인 김윤아의 모호한 위치를 감안한다면 이 정도도 대단한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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