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인자 정식 사원 됐나?"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3>공장일기<27>

등록 2004.03.11 12:13수정 2004.03.1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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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산문화> 2집 '다시 수풀을 헤치며' 차례

<마산문화> 2집 '다시 수풀을 헤치며' 차례 ⓒ 이종찬

"이번 호에는 너거들 작품도 실어야지?"
"저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카모 우짤라꼬예?"
"아, 손님을 먼저 대접했으모 주인도 남은 음식을 쪼매 묵어야 될 끼 아이가. 아무리 신발공장 다니는 사람이 신발 한짝 제대로 신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캐도 그렇지."
"하긴 손님 땜에 주인이 쫄쫄 굶어 죽을 수만은 없겠지예."



그랬다. 사출실에서 그렇게 고된 공장생활을 하던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83년에 마침내 마산문화 2집 <다시 수풀을 헤치며>가 나왔다. 그때 나는 마산문화 2집에 용감하게도 본명으로 "철새보호구역"이란 시를 발표했다.

'철새보호구역'은 내가 다닌 공장 바로 옆에 있는 목동이라는 마을, 갓 철거를 앞둔 그 마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월세방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현장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사실 그대로 담은 시였다.

우리네 마을은
철새보호구역이 아닌데도
해마다 계절을 잊어버린
온갖 철새들이 번갈아 날아와
이름도 주소도 없는
그러나 당연한 듯 새끼를 친다

어떤 젊은 철새들은
아예 새끼치기도 귀찮은 듯
목동의 팔천 원짜리 셋방 주변을
고된 날개짓으로 자꾸 퍼득이다가
초겨울이 다 지나도 텅 빈
허전한 둥지에 보금자리 틀어
밤새도록 악을 쓰며
사랑을 나누었다

공장 사람들은 보너스 없는
연말의 슬픔으로
밤새도록 막걸리 퍼마시며
또 철야근무 할 생각에 몸서리치다가
퉁퉁 부은 새벽
자석에 끌리듯 떼지어
출근하는 공단대로변


이 시린 하늘에 노동해방 그리며
죄인 같은 공돌이와 공순이의 깃털로 갈아입고
산이 아무리 높아도
떠오를 아침해 기다리며
공단 하늘아 무너져라
썩은 세상아 물러가라
땅이 울리도록 꺼억꺼억 울었다

('철새보호구역' 모두)


이 시는 뒤에 <노동의 불꽃으로>란 나의 첫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철새서식처'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내가 다닌 공장과 창원공단에 입주한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공원모집' 공고를 보고 철새처럼 날아드는 현장 노동자들의 식의주를 보호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창원공단에 입주한 그 어느 공장에서도 노동조합이란 게 없었다. 아니 노동자, 노동조합이란 말만 꺼내어도 곧바로 뺄갱이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었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그때부터 아예 소식이 뚝 끊기곤 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아니, 공원 보고 노동자라카는 기 뭐가 그리 크게 잘못된 기라꼬 저렇게 지랄병을 떨어쌓노."
"그라이 내가 하는 말도 그 말 아이가. 정식 사원이 된 저거들이나 근로자라카모 되지 같은 대접도 해주지 않는 계약직 공원 보고 와 자꾸 근로자라카노 이 말이다."


그랬다. 지금 한창 사회적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뿌리는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모집공고를 낼 때 공원과 사원을 분명하게 구분해놓고 있었다. 또한 공원은 일종의 계약직 노동자로 입사하기가 비교적 수월했지만 정식 사원으로 입사하기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웠다.

a 당시 이리저리 파헤쳐진 목동마을, 그 아래는 목동마을에 들어선 공장들

당시 이리저리 파헤쳐진 목동마을, 그 아래는 목동마을에 들어선 공장들 ⓒ 창원시

대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원으로 입사하면 공장에서 정해진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공원으로 입사하면 그런 혜택이 아예 없었다. 그저 일용직 노동자처럼 노동시간에 따른 수당제였다. 하지만 회사에서 정한 모든 규율과 규칙은 공원에게도 사원과 꼭같이 적용되었다.

"니 인자 정식 사원 됐나?"
"안주(아직) 2~3년 더 있어야 된다 카더라."
"그래도 니는 자격증이라도 있으이 참말로 다행이다. 사원이 되는 그런 꿈이라도 꿀 수가 있으이. 내는 앞으로 10년이 아이라 20년이 지나도 아예 사원이 될 수 없다 아이가. 일은 오히려 너거들보다 훨씬 더 많이 하면서도..."


간혹 공원 중에서도 대략 3~5년 정도 회사의 온갖 불합리한 지시에도 묵묵히 일을 하여 사원으로 승진하는 노동자들도 더러 있었다. 또한 그런 노동자들은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졸업했거나, 나름대로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여 기능사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원들은 공장 근무 10년이 지나도 늘 공원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10년 가까이 된 공원들은 인근 포장마차 등지에서 소주만 마셨다하면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란 '늙은 군인의 노래'를 '늙은 노동자의 노래'로 고쳐 부르며 정식 사원이 되지 못하는 서러움을 달랬다.

나는 다행히도 기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입사했기 때문에 공장의 그런 불합리한 제도에 따른 희생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공원 못지않은 올가미, 즉 병역특례병라는 올가미가 덧씌워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임금 인상에서도 늘 불리했고, 공장 간부가 지시하는 여러가지 불합리한 규율과 규칙에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만약 나에게 문학이란 무기조차도 없었다면 아마도 8년에 걸친 그 기나긴 공장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문학은 내게 고된 공장생활을 견뎌내는 유일한 희망이자 공장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제도를 밟고 일어서는 출구였다. 그래서 나는 공장생활 틈틈이 동료 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생생히 담긴 그런 시를 많이 썼다.

하지만 아무 곳에도 발표하지 않았다. 아니,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가 내려진 뒤부터는 시를 발표할 지면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인 이선관 선생의 조언에 따라 공장 안팎 풍경과 현장 노동자들의 삶이 생생히 담겨있는 나의 시를 별도로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 빛을 볼 그날을 기다리며….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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