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되는 두드러기와 코피 그리고 가난

'띠뿌리'를 끓이면서 가족을 생각한다

등록 2004.03.12 07:43수정 2004.03.1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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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뿌리를 캐다
띠뿌리를 캐다김규환

빈부가 유전 되고 대물림되듯…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짐하며 억척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로 현재 자신의 경제·사회적 조건이 곧 자식의 미래까지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자식 낳고 살아본 이들이 부모들로부터 받은 가난을 후세대인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겠는가?

하지만 극복 과정이 과도하면 제풀에 지치고 몸마저 망가진다. 다소 부족하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묘수가 없는 한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이라면 더한 경험과 생각을 했을 거다. 환희와 고난은 극명하게 갈린다.

어느덧 개발시대를 넘어 선 지금 한번 회장은 영원한 회장, 어찌 어찌하여 한번 억만장자는 대를 이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즐기며 세상을 산다. 반대로 천형과도 같은 형벌을 타고난 가난한 자는 열성인만 타고나 대대로 유전된 것처럼 굴레와 멍에를 지고 살고 또 다른 대물림이 시작되어 고착화 단계로 접어든다. 끝없는 연좌제의 발동이다.

나마저 아직은 우리 아이들에게 최상의 조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울 방법과 최소한의 재산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부자들의 그걸 흉내내기도 힘들거니와 마음의 여유마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마땅히 육아법이나 교육철학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한때는 이런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혼인을 서두르지도 않았고 아예 결혼 자체를 포기하고픈 마음에 절망한 적도 있었다.

띠뿌리 줄기부분-억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름
띠뿌리 줄기부분-억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름김규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나와 우리 가족을 옭아맨 천형 한 가지-두드러기


그런데 오늘은 이 슬픈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집안 내력인 천형 또는 또 다른 대물림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한 가지는 두드러기요, 또 하나는 코피다. 이 두 가지는 우리 가족간 공통점으로 자리잡았다.

어머니는 열 아홉에 전쟁피난 시절 아버지를 만났다. 스물 넷까지 5년여 아이를 얻지 못하자 그때 당시 자식 욕심이 무지막지하던 아버지께 쫓겨나다시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외할머니는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부탁을 거듭해 맡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6년째인 스물 넷에 큰형을 얻고 이어 둘째형, 셋째로 누나, 셋째형에 나와 여동생을 얻었으니 느지막이 시작된 출산 치고 결과상으로 여섯은 성공작이었다.

어려서 그 전에는 몰랐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머니께서는 육(肉)고기를 삼가며 거의 채식에 가까운 식사를 하신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우리에게까지 그걸 내놓지는 않으셨다. 맛과 간만 보실 뿐 소, 돼지, 닭고기는 거의 안 드시고 간혹 흑염소탕이나 한번 드시고 생선을 가끔 드실 뿐이었다.

'삐비' 또는 '필기'라 부르며 찔레싹과 함께 많이 먹었던 그리움. 삐비 꽃이 피었네요.
'삐비' 또는 '필기'라 부르며 찔레싹과 함께 많이 먹었던 그리움. 삐비 꽃이 피었네요.김규환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끈적끈적한 봄날 복숭아를 얻어 드시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난다며 방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 안에 있던 나에게 수수빗자루를 꺼내 달라하시고는 아궁이에 불을 살살 지피며 빗자루를 달궈 근질근질 가려운 몸을 쓸어내리셨다. 알맹이가 거의 빠진 수수빗자루를 살갗에 갖다대면 뜨끔뜨끔하다가도 시원한 맛이 나니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알레르기-두드러기엔 민간 요법으로 꽤 효험이 있는 처방이었다.

재채기는 멍하니 코 내부가 뭉클해지며 시원한 맛이 나다가 갑자기 폭발을 하고 연거푸 수회에서 수십 회를 반복하는데 그 원인체가 먼지가 되었든, 꽃가루든 감당하기 힘겨운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재채기 정도면 참을 만하다. 나는 서두에서 천형 또는 대물림이라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나에게도 어머니의 그 몸쓸 병-정상적이지 않는 두드러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뒤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나서도 두고 두고 나를 괴롭힌 진드기, 이, 서캐, 좀 보다 지긋지긋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었던 존재다.

알레르기의 원조는 쐬기나 송충이가 피부에 살짝 스쳤을 때 경험한다. 손바닥보다는 손등이나 연약한 부위일수록 더 따끔거린다. 한두 번 긁다보면 주위가 조금 부어오르고 심한 통증에 얼얼한 현상이 지속된다.

그러나 들과 산에 나가 있을 때면 소독약을 바를 수도 없으니 침 한번 바르고 일에 열중하다보면 금세 아픈 맛이 가시고 만다. 길어봤자 20분이고 극히 일부분에 한정된 외부 침입자로부터 가해지는 알레르기다.

띠뿌리를 씻어 그늘에서 말렸습니다.
띠뿌리를 씻어 그늘에서 말렸습니다.김규환

모든 걸 포기하게 하고 아무 감촉도 없는 무아지경 경험한 두드러기

하지만 두드러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고약한 놈은 침입자나 원인 제공자도 없다. 어느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 뚜껑, 입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 사타구니와 뒤쪽, 겨드랑이, 목덜미, 기타 마찰 부위를 가리지 않고 스멀스멀 벌레 기어가는 현상이 잠시 이어지다가 어느새 탱탱 부어올라 가지고는 이내 멍하면서 황홀한 무아지경 상태로 몰고 간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둔하고 무디고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 누군가에게 주먹으로 한 대 사정없이 얻어맞고 난 뒤처럼 주위 사물을 분간하는 촉감은 무뎌져 세상과의 단절이 시작된다. 만사 귀찮고 격리된 느낌의 지속이라고나 할까. 멀쩡하던 사람이 앞을 보지도 듣지도 감촉도 없는 상황으로 돌변하고 만다.

심한 경우 눈 뚜껑은 밤탱이가 되고, 입술은 아프리카 친구들 입술 두께의 세 배는 된다. 손발에 있던 잔주름은 사라지고 벌에 쏘인 듯 부어오른다. 사타구니와 남아의 물건마저 가만두질 않는다.

맑은 물만 넣고 끓입니다.
맑은 물만 넣고 끓입니다.김규환

이 몹쓸 병마는 어머니에게서 여섯 형제에게 빠짐없이 전해졌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학기 자취를 했다. 아침 굶는 횟수가 잦아진 뒤 혼자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강제로 끌려가 입사한 뒤로는 태평양에 돼지비계 한두 점 둥둥 떠있는 국물, 수증기로 술밥보다 더 고두밥으로 쪄놓은 살로 가지 않을 밥, 반찬은 매끼를 거르지 않고 나오는 지푸라기 같던 생선어묵무침을 먹게 되니 돌아서는 순간 허기를 느끼는 식사를 한 것이 몇 개월 이어지자 내 몸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두드러기가 내 몸에 창궐을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집안 내력을 자초지종 소상히 말씀드리고 물어보았다. 이거 유전 아니냐고…. 그 때마다 원장은 식습관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둥, 치료약이 없지만 그래도 이 거라도 먹어보라며 대학 입시를 앞둔 나에게 절망적인 말만 돌려주었다.

그런 생활이 고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3학년 11월 학력고사가 끝날 때까지 따라다녔다. 오후 7시가 넘으면 쉬 피로해지는지라 학업은 포기하다시피했다. 병원과 보건소 그리고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오가게 했던 그 무서운 질병은 입시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좋은 밥을 먹으며 몸을 추스르자 씻은 듯 말끔했고 현재까지 두어 번 발병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동생이 요즘 두드러기로 고생하고 있다. 조카 녀석들 클 때 보니 한 녀석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그렇다. 식습관이라면 내 어머니로부터 파생하여 누나로 가장 잘 이어졌을 테다. 누나네 아이들인 두 조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머니 손맛을 잊지 못하는 아들들로 이어졌을 것인 바 이런 식습관 또는 식문화는 고스란히 나에게도 남아 피를 나눈 가족의 이력이 되었으니 아마 해강이와 솔강이도 그러겠지….

끓여 나가면 이런 맑고 고운 차가 만들어집니다. 두고두고 장복하면 좋답니다.
끓여 나가면 이런 맑고 고운 차가 만들어집니다. 두고두고 장복하면 좋답니다.김규환

또 다른 대물림 아버지로부터 시작-코피 그리고 '띠뿌리'

이에 더하여 요즘 내 관심사는 또 하나 있다. 얼마 전부터 자고 나서 세 살 솔강이는 자주, 네 살 해강이는 가끔 코피를 흘리는 거다. 코피 나는 건 과로했거나 주거 환경이 극히 나빴을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데 그와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새해가 되면 꼭 한번 들춰본 <토정비결>과 <본초강목> <동의보감>에 나오는 갖가지 약초가 수백 수천 년 간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이뤄 놓은 통계학의 진수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이 통계에 근거해 답을 찾기로 했다.

아버지가 그랬고 큰형부터 모든 형제들이 그랬다. 조카들인 영호, 미리, 한얼, 해솔, 아영, 광민이가 그랬다. 작년엔 한글이와 세종이가 그런 걸 봤다. 세종이 한글이가 집안 내력을 못 속이고 코피를 흘리자 셋째형은 내가 어릴 적 그렇게 맛있게 먹던 '삐비' 뿌리인 '띠뿌리'를 캐다가 삶아줬더니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우리에게 무슨 뿌리를 캐다가 삶아주셨던 그 기억을 해낸 형이 대단하다.

나에게 있어 아이들은 소중하다. 애들이 이만큼 자라준 것도 기특한데 건강히 자라야하거늘 걱정이 태산이었다. 형에게 전화를 해보니 그걸 보리차처럼 끓여서 먹이란다.

둥글래 맛과 비슷하여 달짝지근하면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몇 주 전 시골에 갔다 오던 길에 우리 아이들에게 줄 '띠뿌리'를 한 움큼 캐와 깨끗이 씻어 말려뒀다. 두 번에 나눠 끓이기로 하고 약간 노르스름한 빛이 돌 때까지 조금 오래 끓여서 줬더니 해강이는 맛있다며 잘 먹고 솔강이는 지금 맛을 들여가는 중이다. 풀뿌리 하나에 이런 오묘함이 숨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띠뿌리만 넣어 끓인 차입니다.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띠뿌리만 넣어 끓인 차입니다.김규환


코피 흘리는데 효험 있는 '띠뿌리'
민간요법

'띠뿌리'는 벼과(科)로 새(억새)의 일종이며 잔디 뿌리와 비슷하다. 모근(茅根) 또는 백모근(白茅根)이라고 한다. 기억하기 힘들겠지만 '삐비' 뿌리다. 묘지와 밭가에 많으며 일반 억새의 줄기가 마디가 있고 꼿꼿이 서 있으면서 그나마 꽃이 화려한데 반해 꽃은 봄에 잠시 면화처럼 피었다 날아가 버린다.

또한 그 모양은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 같이 원줄기가 없이 찰랑거린다. 이 줄기로 예전의 비옷인 '도롱이'를 많이 만들어 썼다. 까닭은 빗물이 거의 스미지 않고 바로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뿌리는 닭발처럼 마디가 길게 늘어서 있다. 생으로 씹어 먹는 경우도 많았는데 얇은 풀뿌리 치고 물기를 꽤 많이 머금고 있으면서 둥글래 맛처럼 달다. 끓일 때는 흙을 잘 털어 말려서 차로 끓여 먹는다. 끓인 맛도 전혀 거북하지 않고 처음 먹은 것 치고 무난하다. 재탕해서 먹어도 좋은데 가격도 싸다. / 김규환


부모와 가족간 질긴 끈은 오래 지속된다

끊일 것 같은 뿌리, 멀어져만 가는 가족간의 연결, 자꾸만 협소해져 가는 친척간의 끈도 조금만 주의 기울여 찾아보면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을 바삐 살다보면 잊혀지고 멀어지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20여년 전 중학교 점방 아주머니는 다섯 살 아래 여동생을 보고도 눈매가 닮았다며 "네, 오빠가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했다. 가부장제와 가족이기주의는 모름지기 극복하고 단절할 대상이다. 그렇다고 가정과 가족, 친인척간의 소중함까지 모두 버릴 수는 없다. 그 질긴 끈을 어찌 놓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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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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