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87년 6월'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유창선 칼럼] 임종석의 통곡, 이부영의 절규

등록 2004.03.15 10:46수정 2004.03.1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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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한민공조속에 통과되자, 김근태 원내대표와 임종석 의원이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옆에있던 정동영 의장과 김희선 의원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난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한민공조속에 통과되자, 김근태 원내대표와 임종석 의원이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옆에있던 정동영 의장과 김희선 의원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종호

2004년 3월 12일.

그날 임종석은 본회의장 바닥에 쓰러져 통곡하였다. 경위들에게 끌려나가던 이부영은 몸부림치며 절규하였다. 가결이 선포된 직후 김근태는 오열하는 임종석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유시민도 김영춘도 장영달도 김희선도..... 모두 울고 있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 가운데는 유난히도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이 많이 있다.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5·6공 정권에 이르기까지, 체포와 고문과 투옥을 수없이 겪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도 옛날 이야기. 민주화가 되었고 세상은 바뀌었다. 정권도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되고 교체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 '민주투사'들은 엉엉 우는 모습을 국민들 앞에 보여야 했다. 과거 독재권력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도 눈물같은 것은 보이지 않던 이들을 울게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들이 국회경위들에 의해 사지를 붙들려 개처럼 끌려나오는 장면을. 더구나 그들은 명색이 여당의원이 아니었던가. 국민다수가 반대하는 탄핵안을, 여당의원들을 끌어내고 야당의원들이 통과시켜버린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그날 끌려나오면서 자신들이 유신독재, 5-6공 시절 겪었던 장면들을 다시 떠올렸을지 모른다. 실제로 임종석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농성 중 고립돼 (공권력에) 진압되기 직전의 공포감이 몰려왔다. 여기서 죽더라도 꼭 막겠다,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꼭 막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렇다. 그날의 장면은 과거 박정희 혹은 전두환 정권 시절, 집권세력이 동원한 공권력에 의해 끌려나오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끌어내는 쪽이 야당이고, 끌려나온 쪽이 여당이라는 점이었다.


민주화운동 출신 의원들이 다시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통곡을 보며, 역사의 시계가 다시 뒤로 갈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감이 엄습한다.

누가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 하는가


a 이부영 의원이 경위들에게 팔이 붙들린채 본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다.

이부영 의원이 경위들에게 팔이 붙들린채 본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다. ⓒ 이종호

최악의 경우, 국민다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통령이 하야하고 개헌을 통해 정권이 바뀌게 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야권이 목표로 하고 있는 탄핵정국의 종착지가 결국 내각제 개헌을 통한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그 문제는 간단할 수가 없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확립된,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이 선택된다는 틀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물러날지 모르는 상황을 겪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라고 규정할만 하다.

그 위기의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야당이 총선을 연기하거나 개헌을 추진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야당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여기까지 일을 벌여놓은 야당들이, 총선패배를 앉아서 받아들이겠느냐는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집권세력이 수세에 몰리면 각종 '음모설'이 돌곤했다. '영구집권음모'니 '내각제 개헌 음모'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었다. 실제로 과거 독재정권들은 영구집권을 위한 프로그램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음모에 대한 두려움이 2004년의 한국정치에서 다시 등장하다니. 달라진 것은 정부권력이 아니라 의회권력이 그같은 음모를 꾸밀지 모르는 주체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태를 겪으며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사지를 붙들려 끌려나온 의원들만이 아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30-40대 넥타이 부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87년 6월항쟁을 경험했던 세대들은 그때를 떠올리며 지금을 생각하게 된다.

국민의 뜻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민주주의. 6월항쟁이 거두었던 그 소중한 성과가, 자칫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을 지켜보며 6월항쟁 세대들은 다시 촛불을 들고 '민주수호'의 구호를 외치게 된 것이다. 이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상황은 그만큼 절박하다. 노무현을 지키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문제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누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가. 다행히도 한달후면 17대 총선이 치러진다. 국민들은 이 물음에 대한 자신들의 답을 분명히 내놓을 수 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민의는 우리 정치사, 아니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민의를 두려워하여 선거를 피하려는 음모로부터 17대 총선을 지켜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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