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전 대표와 데이브씨의 아들 다운군은 붙임성이 좋아 '이모' '이모'하며 기자를 따랐다.송민성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데이브가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혼인 신고는 물론 아이의 출생 신고도 할 수 없었다. 강제출국의 불안감은 항상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99년 5월에 남편이 자진출국을 했어요. 그때 저도 따라갔죠. 필리핀에서 혼인 신고도 해야했으니까."
필리핀에서 혼인 신고를 한 후 함께 한국으로 오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불법체류 전력이 있다보니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았고, 가족이라고 설명해도 필리핀에서 한 혼인 신고는 인정해 주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이 대표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다.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데이브가 언제 들어올 수 있을지, 들어올 수 있기나 한 것인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당장 생계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아이는 커가고 언제까지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일단 아이를 필리핀에 보냈어요. 남편에 이어 아이와도 생이별을 해야했죠."
이때 힘이 되었던 것이 바로 필리핀가족모임이었다. 필리핀 남자와 결혼한 여성들로 이루어진 필리핀가족모임은 이와 같은 가족들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나누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99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다들 비슷비슷한 난관에 부딪히니까 누구보다 서로의 사정을 잘 알아요. 함께 고민을 털어 놓고 다독여 줄 수 있다는 게 무척 힘이 됐죠."
"불법체류가 죽을 죄인가요? 가족이 생이별을 해야할 만큼?"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딸의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같이 필리핀에 가자"고 했다.
"아들을 만났는데 나를 못 알아보는 거에요. 한국말도 잊어버린 것 같고. 자식이 알아보지 못할 때 심정은 정말 겪어본 사람만이 알 거예요."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혼자 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남편과 아이가 같이 가야만 했다. 그 길로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 9시간만에 대사관에 도착했다.
"들어가니까 영사관이 우릴 보더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거야. 얼마나 황당해요. 사람이 왔는데."
더욱 황당한 것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서류 뭉치였다. 남편의 입국에 필요하다고 해서 이 대표가 1년에 걸쳐 보냈던 여러 가지 서류들과 데이브의 입국 허용을 요청하는 탄원서, 편지들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영사관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불법체류 전력이 있어 못 보내 준다잖아요. 왜 불법체류를 했는데, 한국에서 안 받아주니까 그런 거잖아요. 불법체류를 했다손치더라도 그게 그렇게 죽을 죄인가요? 가족이 생이별을 해야 할 만큼? 아무리 우리가 힘든 길을 택했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더 큰 짐을 지워줘야 되겠냐구요?"
그러자 영사관은 선심쓰듯 1개월 관광비자를 발급해 주겠다고 했고 이 대표는 단번에 거절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가족이 무슨 관광비자를 받아요. 그랬더니 3개월 방문비자를 다시 주더군요."
한국은 아직도 인종주의적 편견이 강한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