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사진작가 석재현씨 19일 귀국

19일 오후 8시 안국동서 ‘석재현 환영회’ 열려

등록 2004.03.20 02:38수정 2004.03.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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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귀환 사진가 석재현 환영회’

19일 오후 8시께 서울 안국동 편도나무갤러리에서는 석재현씨(34·프리랜서사진가)의 귀국을 환영하는 환영회가 열렸다. 이날 환영회에는 독일인 인권운동가 의사 폴라첸씨를 비롯해 석씨의 선후배·동료사진작가들, 대학 제자들 등 100여명이 참석해 그의 귀국을 축하했다.

바싹 마른 몸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이 유난히 피곤하고 해쓱해 보였다. 마치 지난 1년 2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자 그는 감격스러운 듯 눈시울을 붉혔다.

“오늘 아침 10시쯤 석방 사실을 알았다”는 석씨는 “중국정부의 결정도 있었지만 여러분의 관심 덕분에 빨리 나올 수 있었다”며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편 부인 강혜원(39)씨는 “남편이 석방된다는 소식을 수요일에야 들었다”며, “남편과 함께 체포된 사람들보다 먼저 나와서 죄송하고, 그 분들을 위해서 계속 노력하겠으니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을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환영회에는 미국 <뉴욕타임스>지의 동경지부장 제임스 브룩씨도 참석해 석씨의 귀국을 축하했다. 석씨는 중국에서 <뉴욕타임스>에 그의 사진을 정기적으로 게재했었다. 이런 인연으로 <뉴욕타임스>도 중국의 외교·법무장관, UN대사와도 접촉하는 등 석씨의 석방을 위해 힘썼다.

a 19일 가석방으로 중국에서 귀국한 사진작가 석재현씨.

19일 가석방으로 중국에서 귀국한 사진작가 석재현씨. ⓒ 이정은

석재현씨는 2002년 중국에서 촬영 도중 우연히 만난 탈북자를 통해 탈북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2003년 국제인권단체로부터 탈북자 망명작전 ‘리본’을 듣게 되고 밀착취재를 위해 작전에 참여했다. ‘리본’은 길림성 연길에서 대련을 거쳐 산둥성 옌타이 항에서 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는 계획이었다.


1월 18일 새벽, 옌타이 항에서 탈북자 20여명과 석재현씨를 비롯한 인권단체회원 10여명은 ‘리본’ 실행 도중 현장에서 중국 공안당국에게 체포되었다. 석씨는 불법 월경(越境)조직죄가 적용되어 징역 2년에 벌금 500위안(약 750만원)을 선고 받고 1년 2개월동안 복역한 뒤 19일 가석방되어 귀국했다.

아래는 석씨와 기자들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많이 힘들어 보인다. 건강은 어떤가.
“지금 기분으로는 전혀 아픈지 모르겠다. 그러나 병원에서 검진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살도 빠진 것 같고…. 그래도 작년 겨울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동상걸린 손가락은 치료를 해야할 것 같다.”

- ‘리본’ 망명작전을 도왔다고 하던데.
“나는 취재상 이동만 같이 했다. 체포 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안내가이드와 시민단체 사람들은 체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탈북자들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 감옥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나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난방도 안되고…. 일반인들과 죄수들 사이의 생활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은 배수도 안됐다. 개인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다. 내가 죄인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10년 이상 중형 죄수들과 3개월 이상 함께 있었다. 감옥 안에서는 외부와의 모든 접촉이 차단된다. 14개월 동안의 일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나를 위한 구명운동이 벌어지도 있는 것도. 그러나 대통령 탄핵 소식은 중국 수감자에게서 듣게 됐다. 하루는 신문을 찢어서 들고 오더라. 사람들이 촛불시위하는 모습이었다. 아내와의 면회도 어려웠다. 면회에서는 감독관이 대화를 기록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책은 읽을 수 있었다.”

- 감옥에서 ‘리본’ 작전을 위한 배에 탄 것을 후회했나. 다시 타라면 탈 수 있겠나.
“(웃으며)현명하게 해야 한다.”

- 본인의 석방을 위한 국가적 대응이 미숙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작년 1월 18일 체포된 후 10일 쯤 후에 영사관에서 사람이 왔다. 그동안은 기분도 그렇고 해서 감옥에서 밥도 안 먹고 물만 마셨다. 영사관에서 희망적인 얘기가 없어서 서운은 했었다. 그래도 금방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보다 쉽게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비웠다. 마음이 바뀌니까 생각도 달라지더라. 그러나 체념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외교력을 탓하기보다는 아직 수감중인 사람들에게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 그리고 탈북자들에게도 많은 관심 부탁한다.”

- 폴라첸씨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내가 <뉴욕타임스>에서 일할 때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작업에 임하게 되었다. 수감 후에는 모든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그와 연락할 수가 없었다.”

- 앞으로의 계획은.
“하고 싶은 일은 많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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