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를 본따 만든 미국을 풍자한 깃발, 필리핀 사람들장광열
더 놀라운 것은 앞을 못 보는 맹인도 시위에 나선 것이다. 집회에 여러 번 가봐도 맹인이 참여한 것은 처음보는 것이라 놀라웠다.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시위에 참여한 그는 ‘앞을 못 보지만 남들은 자신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시위에 참여했다.
혹시 한국 사람은 없을까 궁금해 두리번 거리다 보니 몇 명이 눈에 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가가 물어보았다.
“어느나라 사람이세요?”
“중국이요”
“홍콩이요”
“일본이요”
한국사람은 못 만났다. 그래도 이날 만난 두 명의 일본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먼저 만난 사람은 20년째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중년의 켄 히라노이었다. 그는 혼자 시위에 참여하고 있지만, 전 세계의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한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내년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지 60년 되는 해이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핵폭탄으로 희생된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의 상처와 후유증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은 끝났지만, 인류는 아직도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핵무기 보유국들은 핵무기로 다른 나라들 위협해서는 안되며, 핵무기 실험과 개발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지구상의 핵무기를 모두 폐기하기 위한 국제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일본의 반핵위원회의 반핵 서명 운동의 취지에 공감해서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북의 핵개발 의혹이 제기 되어 핵에 대한 공포가 아주 커지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한번 피해를 입어봤기 때문에 그 공포는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그는 북미간의 핵 시비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그런 노력이 확대되어 전세계의 핵무기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오따 아스씨였다. 그는 라이든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작년 같은 날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암스테르담 반전시위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그가 시위에 나온 것은 이라크 전쟁이 부당함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위 내내 휘몰아치는 돌풍을 맞으면서도 들고 있는 피켓을 굳게 부여 잡고 앞으로 한발 한발 옮기는 그의 모습에서 평화를 향한 그의 의지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