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뒷골목, 드디어 빛을 보다

강명관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를 읽고

등록 2004.03.21 21:04수정 2004.03.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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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뒷골목'을 생각하면, 그리 떳떳하지 못한 행동들을 한 곳으로 기억된다. 어른들 몰래 담배를 물어 보거나 감자로 담근 막걸리 술을 마셔 보거나 할 때 그 뒷골목을 택했다.

게다가 어른들 몰래 사귀고 있던 연인을 만날 때에도 언제나 뒷골목을 택해 만나곤 했다. 그것도 대낮이 아닌 어둑해진 저녁 무렵만을 택해서 그런 만남들을 갖곤 했다.


그처럼 떳떳하지 못한 일들, 자랑할 만한 일들이 아닌 숨기거나 감추고 싶은 일들이 그렇게 뒷골목에서 종종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뒷골목에서의 일들은 비단 내가 어렸을 적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이전 시대에도 얼마든지 벌어졌을 법한 일들이다.

그런 생각의 틈들을 조선시대라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활짝 열어준 책이 나왔으니 바로 강명관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2003)이 그것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왕조나 양반 계급으로부터 한 치 빗겨난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그 중심 꼭지를 읽어본다면 수만 백성을 살리고서도 유명세를 날리려 하지 않았던 민중의(民衆醫)를 비롯해, 군도나 의적단과 연계해 빈자들이 활빈(活貧)할 수 있도록 은밀히 도움을 제공했다는 땡추들, 대나무 통 속 노끈에 시험문제를 연결해 과거를 치를 수 있었다던 타락과 부정으로 얼룩진 과거제도, 감동과 어우동으로 대표되는 성 스캔들, 기녀들이 일하는 기방의 실질적 운영자였다던 '왈자패', 기생들을 지배하면서 후기 유흥문화를 주도해 나갔다던 '별감', 그리고 낭비와 도박 등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던 '탕자' 등이 뒷골목 만남의 중심 인물과 내용이다.

물론 그것들은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부분들이고, 그 외에도 도박이나 금주령을 비롯해 반촌 같은 이야기들이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쌍륙은 이규보(李奎報)의 시에도 보이니 고려 때 이미 존재하였으며, 남성들보다는 여성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지금도 안동 지방 고가(古家)의 여인들 사이에서 간간히 행해진다."(p.86)

"감동과 어우동은 부도덕한 남성이 편만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실제 성에 대한 탐닉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훨씬 심했다.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권력을 독점한 남성들이 스스로를 처벌하지 않았을 뿐이다."(p.220)


"이처럼 별감의 존재는 직역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주로 유흥, 술주정, 폭력, 범법과 관련된 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이런 인간들을 역사학에서 다룰 리가 없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무엇보다도 별감은 조선 후기 유흥문화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하다. 또한 별감은 조선 후기 복식의 유행을 주도한 축이었다."(p.300)


그렇게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민간 전승이나 야사를 비롯해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담아주고 있는 책이라 그런지, 역사적 영역에 한 발 가까이 다가 서 있다는 느낌을 결코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럴까.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고 했던 한 역사학자의 말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뇌리 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이유 말이다. 그것은 저자가 조선시대라는 과거사를 읽어 나가면서 틈나는 대로 현대사의 부조리들을 동시에 읽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감명 깊었는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전문도박이나 사기 도박단을 막았다고 하면서도 오늘날엔 왜 복권과 경마가 레저라는 이름으로 더욱 권장되고 있는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는 지적이 그렇다. 또한 신분제의 희생양이 된 반촌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신분제가 사라진 오늘날의 시대에도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서는 반촌과 같은 게토가 존재하고 있다는 저자의 심도 깊은 비판이 그렇다.

"국가는 오로지 도박을 독점하기 위해 자신이 허락한 도박 외에는 모두 금지한다. 대표적인 것이 복권과 경마다. 복권은 체제에 의해 합법화된 도박의 전형이다. 증권 역시 나라에서 권장하는 도박에 다름 아니다. 증권을 일컬어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지만 그 꽃은 흉측한데다 악취를 풍긴다."(p.114)

"서울 시내에 오로지 특정 부류의 인간들만 주거할 수 있게 제한된 공간도 있었다. 물론 그 잘난 양반들은 아니다. 이런 특수한 공간은 거주민의 취향이나 기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에 의해 결정되어다."(p.226)

이 책을 덮으면서 조선의 뒷골목 이야기가 결코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떳떳하지 못했던 뒷골목 이야기들을 이제라도 당당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일들이 언제나 뒷골목 이야기로 감추어질 게 아니라 세상의 밝은 앞길에 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그리 흠잡을 일이 아닌 세상이 됐기 때문에 더 더욱 잘 된 일이랴 싶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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