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가득한 반전의 봄날

[주장] 전선에서 쓰러진 청춘의 꽃들이여

등록 2004.03.23 10:21수정 2004.03.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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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다. 나물 캐는 봄처녀가 개울을 건너오고 있다. 사뿐한 걸음으로 꽃바구니를 든 채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동산을 돌아 환한 웃음을 지며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 한 잎 상큼하게 입에 물고 흥겨운 콧노래로 봄을 부르며 품안에 안기고 있다. 봄. 봄을 노래하여라. 추운 겨울을 이겨냈으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그대로 신성한 축복이요 타오르는 희망의 불꽃이다.

청춘의 소중함을 세월이 지난 뒤에 비로소 깨닫듯이 봄이 지닌 참뜻을 낙엽 지는 가을이 되서야 우리는 비로소 마음 한켠에 쓸어 담는다. 지나간 젊음은 회복할 길 없으나 계절의 순환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실패한 인생을 돌이켜 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일그러진 봄날의 풍경화는 이듬해 기다려 캠퍼스에 다시 그려낼 수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중한 사계의 반추를 통해 인간은 성숙되어 간다.

a 샌프란시스코 시청 광장에서 예수의 형상을 한 반전 시위대의 모습

샌프란시스코 시청 광장에서 예수의 형상을 한 반전 시위대의 모습 ⓒ 김준하


지난 주말 샌프란시스코 시내에는 반전 데모가 열렸다. 헬만 프라자를 떠난 수천 명의 시위대는 마켓 스트리트를 지나 시청사를 향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이라크 전쟁의 종식을 외쳤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1년이 되는 날. 세계 평화를 향한 갈구가 미국 최대의 반전도시의 하늘에 울려 퍼진 것이다.

지금까지 전체 사망자는 4만여 명에 달하며 이중 민간인의 애꿎은 희생이 반이 넘는다. 걸프전의 사망자 3만여 명을 웃도는 수준이다. 해방군의 명분은 갈수록 희석되고 점령군의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명분 없는 전쟁터에서 완전 군장을 갖춘 병사들은 애국이란 미명아래 성조기를 들고 모래바람을 맞으며 싸우고 있다. 날아드는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신음 속에 죽어간 전사들의 명단이 오늘도 본국으로 속속 보고되고 있다.

사망일 3월 10일, 고향 위스콘신 주 엘스워스, 소속은 해병, 연령 23세, 성명 버트 에드워드 호이어. 꽃다운 나이에 그는 갔다. 전쟁터에서 '사라진 얼굴들(Faces Fallen)'의 명단이 매일 이곳 일간지에 발표되고 있다. 한 줄의 전사자 명단으로 처리되는 용사들. 고향의 언덕에 묻혀 눈물의 꽃다발 앞에 평화의 잠을 청하도다.

비장한 경례를 마지막으로 조국의 항구를 떠난 젊음의 기상이 어느 날 한 줌의 흙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오열 속에 대답 없이 묻혔다. 포로로 억류되어 수용소에 묶인 자들과 전사했으되 미처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은 이국의 땅 아래 쓸쓸히 묻혀 신음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 용사 중 전신적인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의 길을 택한 자가 20여 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토록 잔인한 전쟁을 부른 자 그 누구던가. "부시 타도" "이라크 해방"이라는 시청사 앞의 구호가 다만 공허한 울림으로 들려올 뿐이다.

봄은 이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이토록 가혹한 전쟁터에 봄은 더 이상 찾아들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을 통해 일렀건만 순수한 봄의 합창을 거역한 자들에게 계절의 축복은 있을 수 없다. 검은 포화가 하늘에 가득하고 평화의 비둘기 날지 못하니 빼앗긴 들에 봄은 아직 멀었도다.


하물며 봄처녀가 들어설 철쭉의 담장도 이야기 바구니를 담을 멍석의 마당도 우리에게는 없으렷다. 슬픈 봄날에 더 이상의 봄노래는 없고 다만 애절한 반전의 함성만 있을 뿐이다. 군화에 짓밟힌 이라크 동심이 부모를 찾으며 울고 있다.

우리는 이제 처절한 봄을 맞아야 하리. 살아서 숨쉬고 있으니 눈을 들어 국립묘지를 바라 보련다. 비석(碑石) 위에 쓰여진 이름 위에 애국의 혼령(魂靈)을 느껴 보자.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칭송받건만 과연 그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승전가를 울렸다면 승자의 입장에서 비탄에 젖은 패자의 눈물을 새겨 보았는가. 국가를 잃고 방황하는 패전 민족의 참담한 눈물을 헤아려 보았는가. 전세계 각처의 국립묘지에 안치된 수많은 '애국'의 용사들은 이제야 총부리를 거두는구나. 평온히 잠들고 나서야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는구나.

같은 조상의 뿌리에서 비롯된 우리는 지구촌 형제 한 핏줄이다. 지나간 역사의 굴레에서 우리는 또 한번 순환의 원리를 보지 않았느냐. 한때는 로마 제국이 유럽을 호령했고 그 뒤로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세계를 정복했으며 또한 몽고의 기마부대가 아시아를 휩쓴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제국의 위세도 결국 뒷자리를 미국에게 내주고 물러 섰으니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광도 영원할 수는 없는 일. 이제 팍스 차이나의 시대가 꿈틀대고 있는 마당이다.

다시 한번 되새겨 생각해 보자. 진정한 봄이 오지 않는 암울(暗鬱)한 봄날,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반전의 외침을 들으면서 우리는 뼈저리게 반성할 일이다. 겨울이 지나고 꽃은 피건만 참되게 봄을 맞을 자격이 없는 전쟁 집단은 '주홍 글씨'를 이마에 새기고 땅에 엎드려 석고대죄(席藁待罪)하여 머리를 조아릴 일이다.

"하늘이시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참으로 많은 일들로 하여 순환의 원리와 역사의 윤회를 가르쳤건만 그마저 깨닫기는 하였으되 실천하지 못하니 이는 모르고서 행하는 것보다 더욱 커다란 죄와 우(愚)를 범함인지라- 저들에게 봄은 아직도 먼 곳에 있습니다. 처연한 전쟁터의 군상을 굽어보소서. 이 땅에 혹독한 겨울을 다시 내려서 추위를 통해 모두가 헐벗고 굶주린 뒤에 뼈저린 각성의 읍소가 들리거든 그 때에 가서 비로소 봄볕의 따사로운 햇살을 다시금 내려 주소서- 그제서야 봄은 우리에게 올 것이거늘. 빼앗긴 들판에 평화의 꽃이 피는 찬란한 봄날을 회개하여 기다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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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기자는 미조리 주립대애서 신문방송학을 수학하고 뉴욕의 <미주 매일 신문>과 하와이의 <한국일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시사 주간신문의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로스엔젤레스의 부동산 분양 개발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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