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음악이 왜 이리 느려 터졌노"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5>공장일기<29>

등록 2004.03.25 13:33수정 2004.03.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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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84년 봄,  낙동강변에 야유회를 갔다가 자두꽃이 피어난 과수원에 선 서창현(좌)과 나. 서창현과 나는 400여 명이 일하는 조립부에서 유일한 남성 노동자였다

1984년 봄, 낙동강변에 야유회를 갔다가 자두꽃이 피어난 과수원에 선 서창현(좌)과 나. 서창현과 나는 400여 명이 일하는 조립부에서 유일한 남성 노동자였다 ⓒ 이종찬


그랬다. 조립부에서도 툭 하면 안전사고가 났다. 하지만 하루에도 서너 번씩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생산부에 비하면 조립실은 그나마 안전사고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또한 화약을 조립하다가 실수를 하여 화약이 터져도 프레스실처럼 손가락 몇 마디가 아예 잘리는 그런 큰 사고는 쉬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늘 화약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약 조립은 모든 제품 조립이 끝난 뒤 맨 마지막에 처리하는 공정이었다. 하지만 화약 조립을 하는 날은 왠지 모르게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약 조립을 하는 날이 돌아오면 부서장의 안전교육뿐만 아니라 모처에서 파견된 실사 요원까지 현장에 나와 화약의 개수와 조립품의 숫자까지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날, 조립부에서 부서장을 제외한 유일한 남성 노동자였던 나와 창현이는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완장을 찼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은 평소에 쓰고 있던 흰 스카프를 벗고 빨간 스카프를 썼다. 이어 화약 조립이 시작되면 나와 창현이는 화약고를 들락거리며 조립할 화약과 화약이 조립된 제품을 차질 없이 날라야 했다.

화약고는 평소 몇 겹의 튼튼한 철창문으로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고, 그 근처에는 어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행여 누군가 무심코 담배불을 화약고에 던지기라도 하면 창원공단 전체를 일시에 날려버릴 만한 무시무시한 폭탄으로 변하는 곳이 화약고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음악이 와 이래 느려 터졌노?"
"오늘은 화약 조립을 하는 날인께네 무조건 조심을 하라는 그런 이야기것지, 뭐."
"차암! 니도 장사 하루 이틀 해 보나. 조금 있어 보라메(보라며). 지금은 처음이니까 저래 쌓지, 나중에 생산량이 조금 적다 싶으모 금세 빠른 음악을 크게 틀끼다."


그랬다. 당시 공장에서는 조립부에 한해서 하루 종일 나즈막한 대중가요를 틀어주었다. 그런 까닭에 검사가 끝난 제품을 조립부로 싣고 오는 생산부 노동자들은 누구나 유행가요를 들으면서 일을 하는 조립부야말로 공장의 천국쯤으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조립부에 유행가요를 틀어주는 것은 공장 간부들의 교묘한 수법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날에 비해 그날의 생산량이 조금 적다 싶으면 갑자기 경쾌하고도 재빠른 가요를 귀가 따갑도록 크게 틀어 주었다. 또한 그렇게 하면 그 가요를 듣는 여성 노동자들의 손이 자신들도 모르게 빨라지곤 했다.

조립부에 틀어주는 대중가요. 언뜻 듣기에는 무척 달콤하고도 분위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대중가요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노동력 착취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대중가요를 틀어 주는 것이 공장 간부들의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때때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니는 지금 로봇처럼 일하는 이런 기 뭐가 그리 좋다꼬 노래까지 따라 부르노. 절마들이 우리로 가꼬(가지고) 노는 기 그리도 기분이 좋나."
"그렇다꼬 가요조차도 안 틀어주모 또 우짤끼고. 그나마 요새 유행하는 가요라도 들음시로(들으면서) 일로 한께네 쪼매 덜 피곤하다 아이가."
"문디 가시나! 니 겉은 거 때문에 요새 잔업도 못한다 아이가. 요번 달에는 잔업이라도 열심히 해가꼬 동생 학비도 내야 되는데…."


어느 부서나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업 환경이 깨끗하고 유행가요까지 들어가면서 일을 하는 조립부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늘상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깨끗한 조립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생산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이 높은 것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공장에서는 생산비 절감을 위해서 QC(품질관리)니, 기계 전자동화니, 뭐니 하면서 현장 노동자들의 숫자를 점차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전에 하루도 건너 뛰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강요했던 잔업이나 철야 근무를 하는 것조차도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들 손으로 품질을 개선하고 기계 자동화까지 이루어 냈으모 월급을 더 올려주지는 못할 망정 아예 밥줄까지 끊어낼라꼬 덤비니…."
"그라이 내가 뭐라 카더노. 절마들이 뻔지르르하게 내뱉는 말로 믿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모 결국 우리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기라 안 카더나."
"니기미! 고생은 되더라도 다시 옛날로 돌아갔으모 좋것다. 도저히 이 월급 가꼬는(가지고는) 못 묵고(먹고) 살 것다."


그랬다.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창원공단에 입주한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QC 바람과 기계 자동화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다니던 공장의 각 부서에서도 매월 'QC경진대회' 같은 것을 열어 현장 노동자들의 오래 축척된 경험과 기술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는 조립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립부는 공장 간부들의 표적이 되었다. 왜냐하면 공장 안에서도 다른 부서에 비해 노동 강도가 비교적 낮은 조립부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공장 간부들은 조립부의 생산 라인을 철저하게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라인은 아예 없애거나 통합시켰다.

IMF가 따로 없었다. 현장 노동자들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생산비 절감에 따른 라인 통폐합, 권고사직, 해고 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립부 여성노동자들은 조그만 실수를 해도 가차없이 시말서를 써야 했으며, 시말서를 3회 이상 쓰게 되면 스스로 공장을 떠나야만 했다.

비단 조립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부서에서도 시말서를 3회 이상 낸 노동자가 스스로 공장을 그만 두지 않으면 강제로 부서 이동을 시키거나 아예 왕따 취급을 함으로써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떠나게 만들었다. 특히 그 당시에는 노조가 없었기 때문에 회사의 부당한 요구에 따른 어떤 저항이나 집단적인 시위를 할 수도 없었다.

"창현아! 이라다가 우리도 다른 부서로 쫓겨나는 거 아이가."
"설마 우리 둘까지 우째 하것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라고 조립부 가시나들이 아무리 줄어들어도 우리 둘이 하는 일을 가시나들이 대신 할 수는 없다 아이가."
"하긴. 우리 둘을 다른 부서로 보낼 수는 없것지. 간부들이 라인을 돌아다님시로(돌아다니면서) 직접 부품을 나른다면 몰라도."


참으로 슬프고도 처참한 현실이었다. 말 그대로 현장 노동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공장의 부품 같은 것이었다. 기계를 돌리다가 어떤 제품이 필요하면 급히 갖다 쓰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가차없이 버리는 그런 부품 같은 존재가 현장 노동자라는 슬픈 이름표를 단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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