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탄시암에 얽힌 미스터리

동백꽃 따라 떠난 남도 섬여행 (2)-보길도

등록 2004.03.25 16:28수정 2004.03.2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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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송호리 선착장 가는 길

a 둥굴둥글 여유로운 남도 들녘과 푸릇푸릇한 마늘밭 아래에 펼쳐진 일망무제의 바다

둥굴둥글 여유로운 남도 들녘과 푸릇푸릇한 마늘밭 아래에 펼쳐진 일망무제의 바다 ⓒ 김정은

땅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 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고은/ '땅끝'



땅끝 전망대 계단 옆 화강암 조각에 쓰인 간단한 시 한 구절이 지금 땅끝 선착장을 향해 달리고 있는 나의 머리 속에 뱅뱅 맴돌고 있다. 땅끝도 모자라 어떻게든 땅끝을 벗어나려는 이기심 덩어리 인간이 여유로운 남도의 품안에서 잠시 순한 양이 되는 순간이다.

둥굴둥글 여유로운 남도 들녘 푸릇푸릇한 마늘밭, 그 아래 펼쳐진 일망무제의 바다….

a 보길도 가는 배를 기다리며 바라본 땅끝 선착장 주위 전경. 보길도 여행을 더욱 설레게 한다.

보길도 가는 배를 기다리며 바라본 땅끝 선착장 주위 전경. 보길도 여행을 더욱 설레게 한다. ⓒ 김정은

지금 나는 한날 한시도 조용할 틈 없는, 이 정신 없는 나라의 남쪽 땅 끝에 와 있다.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감싸 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남도의 넉넉한 모습처럼….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은/‘삶’중에서


담비가죽옷과 여든세살 노정객

a 우암 탄시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조성된 오솔길. 비릿한 바다내음과 육지의 풀내음이 뒤섞인 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우암 탄시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조성된 오솔길. 비릿한 바다내음과 육지의 풀내음이 뒤섞인 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 김정은

보길도 청별항에서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백도리 절벽에 가면 보길도 12경중 하나인 우암 탄시암이 바다를 향해 외롭게 서있다. ‘송시열 글씐 바위’라고 써 있는 이정표를 보며 맞은 편에서 자동차와 마주치지 않길 기원하며 좁은 포장도로를 조심조심 올라갔다.

a 최근에 세워진 듯한 안내비. 원래의 석벽과 꽤 떨어져 있다.

최근에 세워진 듯한 안내비. 원래의 석벽과 꽤 떨어져 있다. ⓒ 김정은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찬 푸른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길래
세 번이나 쫒겨나니 궁한 운수로다.
북녘 끝 부질없이 님을 우러르며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담비 갖옻 내리신 옛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1689년 제주로 유배가던 중 풍랑을 만나 잠시 보길도에 들렀을 때 이 곳 백도리 석벽에 남겼다는 이 시를 보면서 복잡한 상념에 젖게 되었다.


a 일명 '송시열 글씐 바위'의 훼손된 모습. 자세히 봐야 한자 몇자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일명 '송시열 글씐 바위'의 훼손된 모습. 자세히 봐야 한자 몇자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 김정은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코끝을 싸하게 할만큼 쌀쌀한 해풍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린다. 이렇게 춥고 바람이 부니 유배길에 나선 여든세살 노인이 이 절해고도에서 얼마나 추웠겠는가. 오죽하면 예전 잘 나갈 때 군주가 하사한 담비갖옷(담비가죽옷)으로 겨우겨우 추위를 이겨내니 임금 생각이 절로 날 밖에….

지금 자신의 궁벽한 신세를 한탄하는 시의 내용을 보며 여든세살 노인의 고생이 불쌍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실소가 난다. 이 머나먼 유배지에 웬 담비가죽옷? 요즘식으로 대입하면 높으신 나으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춥다고 밍크 코트 입는 식이 아닐까?


이처럼 옛날 조선시대의 담비가죽옷은 최상의 사치품이었다. 오죽하면 연암 박지원이 <영처고서>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썼겠는가.

우암 탄시암의 또다른 미스터리
송시열의 시만 새겨진 것이 아니다?

송시열 글씐 바위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글자를 확인해 나가다 보니 송시열의 시와는 다른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은 바로 이런 내용이다.

이 나라에 우암이 계시니/ 백도에 시를 남겼구나 /유도는 옛부터 곤액이 따르는데/ 큰 어른에게 어려움이 닥쳤구나 /남아있는 글귀는 춘추시대의 글인데 / 거친 바닷바람에 초구에 지는 눈물이여 /외로운 신하의 한없는 느낌을/ 하늘의 해만이 그 붉은 마음 비쳤으리라
- 정해년(1707) 7월 후학 임관주가 제주도 유배가다가 백도에 올라 우암선생의 후풍시를 알고 바위면에 다시 이어 새깁니다. 감격하여 김태경


내용을 보면 송시열을 따르고 연모하는 임관주라는 사람이 제주도에 유배가는 도중 이곳에 들려 시를 읽고 감격하여 시에 대한 감상을 이어 적은 것 같은데 시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지나친 존경의 표현에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시 후에 나오는 정체불명의 김태경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과연 이 글을 이어 쓴 임관주란 사람은 어떤 본심을 가지고 이 글을 썼을까? 이 또한 우암 탄시암의 또다른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 김정은
수박 겉을 핥고, 후추를 통으로 삼킨 자와는 더불어 맛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 여름에 빌려 입은 자와는 때(時)에 대하여 같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석벽에 새겨진 송시열의 시는 숯검댕이로 뒤덮여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누가, 언제 훼손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그 훼손된 연유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탁본도 뜰 줄 모르는 몰지각한 관광객이 초등학교 판화에 잉크 묻혀 찍어내듯 사정없이 바위에 먹물을 묻혀 몰래 탁본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통설이나 송시열의 글을 그저 소장하고픈 마음에 이 먼 곳까지 먹물을 가지고 올 성의라면 탁본의 기초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송시열이나 그 글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어떤 이가 먹물로 지워버렸을까? 범인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 한 아마 이 의문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것 같다.

송시열과 윤선도

송시열과 윤선도는 당쟁이 가장 격화된 숙종 때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세력의 우두머리와 세력 싸움에서 실패한 남인 가문의 후예라는데서 태생적으로 양립할 수밖에 없는 정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송시열과 윤선도는 1659년 효종 사망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을 때 치열하게 대립한 적이 있다. 송시열 이하 서인세력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한 데 대해 윤선도 이하 남인세력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더라도 군주이므로 장자와 동일하다고 해석하여 삼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때의 승자는 송시열이었고 패배한 윤선도는 삼수로 유배를 떠났다. 결국 1667년 풀려나 1671년 85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 곳 보길도 부용동에서 은거하며 살고 있었으니 윤선도 입장에서 송시열이라는 자는 중요한 고비마다 자신의 창창한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그처럼 끈질기게 윤선도의 앞길을 막았던 송시열도 정적인 윤선도 사후 그 막강하던 지위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노구에 정치적 시련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1674년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사망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논쟁이 다시 거론되었을 때 패배하여 윤선도와 똑같은 신세로 덕원으로 귀향을 갔다 겨우 풀려났고 그 후 1689년(숙종15)에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되던 중 태풍을 만나 정적(政敵)의 왕국인 보길도에 다다르니 이 때는 바로 윤선도가 사망한 지 18년이나 흘렀을 때였다.

인과응보요 새옹지마라, 이런 상황에서라면 노정객의 심사는 꽤 착잡했을 터인데도 우습게도 대유학자라는 그의 시에서는 그러한 복잡한 회한 대신 오로지 자신의 신세 한탄과 담비가죽을 하사한 임금의 은혜만 칭송하고 있으니 씁쓸할 뿐이다.

a 오솔길 양지바른 꽃에 살그머니 기지개 핀 들꽃. 이런 들꽃의 생명력이 바로 우리네 삶 아니던가

오솔길 양지바른 꽃에 살그머니 기지개 핀 들꽃. 이런 들꽃의 생명력이 바로 우리네 삶 아니던가 ⓒ 김정은

무엇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정객을 이렇게 냉혹하고도 단순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정치란 마약인 것같다. 처음 마실 땐 기분 좋지만 결국은 중독되어 자신의 본성마저 잃게 만드는 지독한 마약의 위력….

과연 보길도에서 추위와 노환으로 떨고 있던 송시열은 그의 생애에서 최대 라이벌 중 한명인 윤선도에 대해서 어떠한 감회를 가지고 있었을까? 두차례 예송논쟁이 겉보기에는 애싸움하듯 단순하고 별볼일 없어 보이지만 이 상복문제에는 문벌과 학파, 당파 등이 모두 얽히고설킨 고도의 정치쇼임이 틀림없는데 그 와중에서 도탄에 빠지는 것은 순진한 백성들일 뿐 승자가 되었든 패자가 되었든 정객들이야 귀향을 가서 춥더라도 담비가죽옷을 걸치면서 오로지 북향사배에 임금생각만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지금의 민생이 어찌되든 말든 자존심 싸움하는 탄핵정국과 어찌 그리 같은지…. 세상은 돌고 돈다고 근 400여년 전의 정치판이나 지금의 정치판이나 복장과 말투와 싸우는 인물들만 다를 뿐 판박이를 하듯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한 송시열의 또다른 시조 한 수를 떠올리며 그의 정적이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왕국 부용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님이 혀오시메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든 정을 뉘손데 옴기신고
처음에 뮈시든 거시면 이대도록 셜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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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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