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삶보다 더 진지하다

장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본 놀이 문화

등록 2004.03.25 17:14수정 2004.03.2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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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를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놀이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롤러볼

'호모 루덴스'라는 말처럼 인간에게는 유희의 욕망이 있다. 이 유희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은 놀이 문화이다.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놀이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선은 규칙과 위반의 문제, 그리고 지속성의 문제이다. ‘법칙’은 강요받는 제약이고, '규칙'은 스스로 강요하는 제약이다. 법칙에 대립되는 것은 법칙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규칙’인데, 법칙은 위반될 수 있고 또 위반될 수밖에 없는 반면, 놀이에 참여하게 되면 놀이의 규칙을 위반해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

규칙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 놀이의 기본 전제이며 규칙을 위반한다면 놀이는 성립되지 않거나 중단된다.‘해방은 언제나 자연주의적이다’ 라는 그의 말은 놀이에 대한 정의처럼 들리며 또한 삶에 대한 정의처럼 들린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삶'이라는 말은 놀이를 포함한 광의의 의미에 앞서, 놀이가 아닌 일상의 삶을 지칭한다. 물론 놀이의 기본 속성이 '일상성'이기 때문에 의미의 중첩은 불가피할 것이다.

a 보드리야르, <유혹에 대하여>

보드리야르, <유혹에 대하여> ⓒ 백의

“놀이를 중단하는 것은 놀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는 자유가 아니다. 놀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의무의 의례적인 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놀이의 유일한 원칙은 규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법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 <유혹에 대하여>, 169쪽 )

놀이로서의 스포츠, 놀이로서의 도박, 놀이로서의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다.‘놀이 규칙을 선택하고 그 체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일상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것이 바로 놀이의 목적이며, 이런 해방감을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놀이에 몰두한다.


놀이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규칙에 복종할 수도 없다.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으며 규칙은 일정한 기호를 활용한다. 인터넷 대화방이나 메신저에서의 대화 행위는 일상적 삶과 놀이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일상생활과 동일한 어법이 아닌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른 기호를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다면‘놀이’가 시작된다.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서‘하오’체를 사용하는 것이라든지, 이른바 ‘필수요소’라고 불리는 규칙과 기호를 따르지 않으면 사진 합성 놀이에 참여할 수 없다. 기호는 모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놀이에 참여하는 성원들은 이 의미를‘동일하게’가 아닌‘비슷하게’ 공유한다.


기호의 빗장이 의미의 습관적인 부유선 아래로 내려올 때는 의미 과다의 즐거움이 있다.’ ( <시뮬라시옹>, 67쪽 )

기호의 습관적인 부유선이란 기호가 환기하는 일반적인 의미, 서로 비슷비슷하게 공유하는 생각들이 거의 일치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기호를 본 사람들이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행위를 한다면 이 ‘습관적인 부유선’에 기호의 빗장이 걸려있는 셈이고, 만일 정확히 일치한다면 기호는 더 이상 기호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소멸한다.

사물 자체가 되는 것이며, 이런 경우에는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놀이가 지속적인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기호의 습관적인 부유선을 얼마나 오르내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위의 말은 ‘기호의 빗장이 의미의 습관적인 부유선 위로 올라갈 때는 의미 결여의 신비함이 있다’라고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의 일상성, 현실로서의 놀이 문화

일상성이라고 하는 건 반복 속에서의 차이다. ( <소비의 사회>, 170쪽 )

놀이는 마치 일상생활처럼 순환적이며 반복적이다. 일상과 놀이를 구분하는 것은 ‘법칙’을 따르느냐, ‘규칙’을 따르느냐 하는 문제일 것일 뿐이다. 새로운 놀이 문화가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사실 놀이의 기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문학에서의‘낯설게하기’처럼 다만 그 기법만이 유행에 따라 덧입혀지는 것이다.

일상성은 놀이의 기본 속성이다. 일상성이라고 하는 건 반복 속에서의 차이다. 똑같은 규칙 속에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기고 사람들은 이 차이를 즐긴다. 스포츠도 도박도 온라인 게임도 모두 같다. 모 방송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쟁반 노래방’을 볼 때의 즐거움도 이와 마찬가지다.

놀이가 일상성을 갖지 못할 경우 놀이는 문화가 되지 못하고 현상에 머물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온라인게임과 플래시몹, 외계어 사용 등을 일상성이란 스펙트럼에 비추어 본다면 각각 조금씩 다른 색깔의 빛이 나올 것이다.

a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 문예출판사

“시험 만능의 상황은 이중 구조로 돼 있는데, 누구나 시험당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시험관,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 <소비의 사회>, 146쪽 )

우리가 우리의 어떤 능력에 대해 누군가에게 시험당한다는 사실이 권위를 가짐으로써 놀이도 권위를 가진다. 나의 능력에 대한 시험 과정으로서의 놀이가 있다. 이런 특징을 가장 뚜렷히 보여주는 것은 퀴즈프로그램인데 사람들은 퀴즈프로그램에 대해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과 집착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성향에 대해 보드리야르는‘퀴즈프로그램이 강력한 사회통합과정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지식검색 같은 경우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지적 시험대로서의 놀이가 돼가고 있으며 이런 놀이의 과정이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역방향으로 제공됨으로써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확실히 놀이는 삶보다 진지하다. 일상의 삶이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놀이가 추구하는 것은 유혹과 승부의 즐거움이다. 유혹이란 방향을 전환시키는 힘이며 유혹은 권력보다 강한 힘이다. 우리가 매일 방문하고 있는 포털 사이트는 거대한 놀이의 공간이며 유혹의 공간이며 권력만큼 강한 힘이 움직이고 있는 곳이다.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크르

장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원본이 아닌 원본과 유사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원본과 유사한 세상을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것을 말한다.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된다.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는 체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하기(시뮬라시옹)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이다. 전자는 있음에 속하고 후자는 없음에 관계된다.

a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 민음사

디즈니랜드는 모든 종류의 얽히고 설킨 시뮬라크르들의 완벽한 모델이다. (…)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 ( 마치 감옥이 사회 전체가 그 평범한 어디서고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는 것과 약간은 유사하게 ).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 이 세계가 어린애 티를 내려 하는 이유는, 어른들이란 다른 곳, 즉 <실제의> 세상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유치함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이며, 어른들의 유치성 그 자체가 그들의 실제 유치성을 환상으로 돌리기 위하여 여기서 어린애 흉내를 낸다. ( <시뮬라시옹>, 39-41쪽 )


‘우리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러니의 절정에 있다’고 말한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시뮬라크르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적이다. 이는 놀이 문화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네티즌의 놀이 문화를‘장난’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놀이 문화는 일상적이고 삶보다 진지하며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새로운 놀이 문화가 등장했을 때 그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이 현대적 필요에 따라 다른 유행으로 재출현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놀이 문화는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한 의도이거나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 목적이다. 시뮬라크르로서의 놀이는 어떤 것이 있을까.

‘민중은 혁명을 원치 않고, 혁명의 광경만을 원했다.’ - 리바롤 ( <유혹에 대하여>, 78쪽 )
다큐멘터리와 ‘생중계’가 성행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고 기술의 향상과 함께 현실의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 <소비의 사회>, 178쪽 )
미디어는 사건과 공포의 일부를 이루며, 미디어는 어느 한 쪽으로 작용한다. ( <테러리즘의 정신>, 33쪽 )
우리의 폭력은 정열과 본능에서보다는 오히려 스크린에서 생겨난다는 의미에서 가장된 폭력이다. (…) 가상의 표면인 스크린은 어쨌든 이미지의 실제 내용으로부터 우리를 매우 잘 보호하기 때문이다. ( <토탈 스크린>, 103쪽 )


여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텔레비전 시청은 놀이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크르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현실을 본다. 예전에 방송은 놀이와 현실을 교묘히 뒤섞었는데, 이젠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놀이로서의 영화 보기와 CNN 뉴스를 통해 이라크 전쟁 보기가 같아진 것이다. '구경거리적인’폭력과 일상생활의 안전은 서로 동질적이다. 불구경이 재미있는 것은 여기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몰래카메라가 재미있는 것은 적어도 여기는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이 헛된 것이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게 스펙터클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 잘 나와 있다. 놀이로서의 TV시청이나 놀이로서의 웹서핑이 현실이며 일상이 되고, 일상의 폭력이 되기도 한다. 놀이와 일상과 폭력의 클러스터.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와 컴퓨터 딥 블루의 대결을 기억할 것이다. 전 세계인의 관심 속에 카스파로프는 마침내 컴퓨터에게 승리를 했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체스라는 놀이, 원본(인간)과 유사한 컴퓨터와 인간과의 대결, 지적 능력의 시험, 텔레비전을 통한 전 세계 중계. 이런 상황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딜레마를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이 장면을 지켜보고 마음이 가벼워졌던 사람들은 모두 거대한 놀이에 참여한 것이고 이는 그 어떤 현실이나 일상보다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광경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이 정보는 더욱 많아지고 의미는 더욱 적어지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즐거운 삶을 원하며, 놀이 문화는 늘 그 속에 혈액처럼 흐르고 있다. 인간에게 ‘놀이’란 어떤 의미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백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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