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으니까 검다고 하지요"

최고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아이들

등록 2004.03.27 08:44수정 2004.03.2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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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봄날인데다 점심을 막 먹고 난 뒤의 5교시 수업이라 그랬는지 눈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는 아이들이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중 한 아이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색 보드마커를 들이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 이 보드마커가 무슨 색깔로 보이냐?"
"예? 거, 검은 색인데요."
"그래? 너도 이것이 검은 색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나도 검은 색으로 보이는데."

검은 색 보드마커가 검은 색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거늘, 그것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하고 있는 선생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 저는 몸을 돌려 전체 아이들을 향해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보드마커가 검은 색으로 보입니까?"
"당연하죠. 검은 색이잖아요."

그런 물음을 던지기 전부터 입이 근질거린 것이 분명한 한 아이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입니다. 저는 일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내심 즐기며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봄에는 몸이 나른해지면서 정상적인 사람도 붉은 색이 검은 색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아지면서 시각을 관장하는 호르몬이 과다 방출되기 때문인데, 봄철 기온이 갑자기 높아지는 오후 2시경에 그런 현상이 심하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보면 다시 본래의 색깔로 보인다고 하네요. 자,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한번 보세요. 어떻습니까? 이 보드마커가 무슨 색깔로 보입니까?"

"검은 색으로 보입니다."
아이들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단호했습니다.


"검은 색이 아니라는데 왜 자꾸 검은 색이라고 하죠?"
"검으니까 검다고 하지요."
저는 이쯤해서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저는 여러분을 속일 수 없었을까요? 선생님의 말솜씨가 부족해서일까요? 선생님은 여러분보다 더 많이 배웠고, 문학을 좋아해서 말도 좀 잘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속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느라 눈알을 굴리고 있던 한 아이의 눈빛이 차츰 진지해지더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건, 보드마커가 검은 색이기 때문입니다."

정답이었습니다. 너무 쉬워서 더 난해할 수도 있는 답을 용케도 알아 맞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는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검은 색을 검은 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학식이 높고 머리가 명석하고 말솜씨가 뛰어나도 검은 색을 붉은 색이라고 속이기는 어렵습니다. 학식을 많이 쌓고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옳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전날 밤, 저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국회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한 유명작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다수 국민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색과 붉은 색의 차이는 너무도 분명한데, 내노라하는 최고의 지식인인 그가 검은 색을 붉은 색이라고 우기는 형국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검은 색을 붉은 색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기본적인 판단조차 흐리게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문득 아이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고만고만하여 최고와는 거리가 먼 보통 아이들. 저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올곧은 눈을 갖기만 한다면 최고를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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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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