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으로 들어와 셋으로 흘러가나니...

[동백꽃 따라 떠난 남도 섬기행 - 3] 보길도 세연정 연못

등록 2004.03.28 18:41수정 2004.03.3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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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개 걷힌 예송리 해수욕장의 아침, 저 멀리  전복 양식장인 듯한 부표가 촘촘히 보인다.

안개 걷힌 예송리 해수욕장의 아침, 저 멀리 전복 양식장인 듯한 부표가 촘촘히 보인다. ⓒ 김정은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1)


봄이라고 하지만 옅은 안개와 바닷바람의 스산함 때문인가? 우암 탄시암에서 남쪽, 이제 막 해가 중천에 떠 어스름한 새벽을 깨우는 인적없는 예송리 해수욕장의 이른 아침 바닷가 풍경은 막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준비로 부산하기만 하다.


a 바닷바람에 서서히 말려지는 미역의 느긋한 기다림이 신기하다.

바닷바람에 서서히 말려지는 미역의 느긋한 기다림이 신기하다. ⓒ 김정은

바닷바람에 서서히 말려지기를 기다리는 미역의 느긋함이 있는가 하면, 벌써 톳 채취를 끝내고 배를 안전지대로 정박시키기 위해 자갈밭으로 배를 밀어올리느라 애쓰는 어부의 분주함도 있다. 갯돌밭으로 가득 쏟아낸 톳을 다듬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에서 진하고 끈끈한 어촌의 생활력이 느껴진다.

"이 톳으로 말하자면 무쳐 먹어도 맛있고 영양가도 좋지라. 한 번 사서 잡숴보소."

무슨 말만 꺼내면 비닐 봉투에 톳을 마구 집어넣어 건네며 값을 흥정하려 드는 아주머니의 상술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녀들의 장삿속이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갯내음처럼 진하게 배어나오는 강인한 생활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곳 보길도 주민들의 생활은 풍족해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김양식을 대신해 고소득 작물인 전복을 양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a 막 캐 온 전복들을 방파제에 올려놓느라 분주한 섬주민들.. 전복이야말로 이 곳 섬 주민들의 노다지가 아닐까?

막 캐 온 전복들을 방파제에 올려놓느라 분주한 섬주민들.. 전복이야말로 이 곳 섬 주민들의 노다지가 아닐까? ⓒ 김정은

부용동을 향해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길, 마침 채취한 양식 전복이 가득 담긴 상자들을 방파제로 끌어올리는 작업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상자에 가득한 싱싱하고 알이 굵은 전복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전복은 지나가는 여행객에게는 먹기 힘들 만큼 비싼 귀한 먹거리지만 이곳 어민들에게는 귀하디 귀한 노다지나 다름 없다. 이것을 팔아 육지로 유학을 간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여유로운 생활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a 갓 캐내어 상자에 담겨져 대기하고 있는  싱싱한 보길도의 양식전복들

갓 캐내어 상자에 담겨져 대기하고 있는 싱싱한 보길도의 양식전복들 ⓒ 김정은

그 옛날 진도와 노화도에서 간척사업으로 논을 일궈내는 데 성공한 윤선도가 유독 자신의 왕국인 이곳 보길도의 간척 사업은 실패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양식 사업으로 그들만의 희망을 가꾸고 있었다. 이들을 보고 있자니, '정녕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스친다.

이 정신없는 세상이 그래도 이나마 굴러가고 있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루 하루를 꾸준히 노력하는 민중들의 땀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또 다시 확신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공사 중인 세연정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다

a 봄빛이 화사한 세연정의 모습

봄빛이 화사한 세연정의 모습 ⓒ 김정은

조선시대 시조 문학의 황금기를 장식한 사람이자, 문학만이 아니고 철학을 위시해서 천문, 지리,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에 지금의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천재성이 엿보였는지 8세 때 친부를 떠나 숙부인 유기(唯幾)의 양자로 들어가 호남의 대부호인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게 됐다. 그러나 이처럼 재기가 번뜩이는 윤선도라 하더라도 그의 정치 생활은 출사와 귀양과 귀향이 반복되는, 한 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1612년 진사시험에 합격하고부터 벼슬을 지낸 윤선도는 관좌에 있던 날보다 귀양살이와 귀향살이로 지낸 날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유배의 이유도 다양해, 광해군 때는 당시 세도가 이이첨과 같이 잘못된 지배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고, 벼슬을 하사했는데 이행하지 않아 건방지다는 괘씸죄가 작용하기도 했다. 남인이면서도 서인계 서원인 정계청서원 폐지를 막으려 했다는 이유 등 실로 다양한 죄(?)를 범했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지난번 글에서 송시열과 관련해 언급한 1659년 1차 예송논쟁에서 패하고 삼수로 유배 간 일이라 하겠다. 고산연보에 나온 그의 생애를 대략 흝어내려가다 보니 어찌보면 "고산 윤선도는 벼슬살이가 체질상 맞지 않는 영원한 아웃사이더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특히 1652년(효종3년) 예조참의직을 사직하기 위해 썼다는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에서 윤선도가 주장한 내용을 보니, 이런 나의 생각을 더욱 굳어졌다. 시무팔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畏天(하늘을 두려워하라)
治心(마음을 다스려라)
辨人材(인재를 구별하라)
明賞罰(상벌을 명확히 하라)
桭紀綱(기강을 세워라)
破朋黨 (당쟁을 없애라)
强國有道(강한 나라에 길이 있다)
典學有要(학문이 필요하다)


a 세연정 안에서 굽어본 세연지, 이곳에 물이 찼을때는 얼마나 멋있었을까 상상 속에 빠져본다.

세연정 안에서 굽어본 세연지, 이곳에 물이 찼을때는 얼마나 멋있었을까 상상 속에 빠져본다. ⓒ 김정은

이런 그가 벼슬살이를 걷어치우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으며 돌아와 은거하던 곳이 보길도이다. 그 중 그가 꿈꾸는 안빈낙도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 부용동이요, 핵심이 바로 세연정과 세연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가 찾은 세연정은 기존에 상상하던 바와 많이 달랐다. 이 일대에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부용동 유적지 개·보수작업의 여파였다.

a 세연정에도 어김없이 붉게 핀 동백꽃의 물결

세연정에도 어김없이 붉게 핀 동백꽃의 물결 ⓒ 김정은

결국 세연정과의 인연은 이뿐이라 체념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다행히 동백꽃은 섭섭한 내 맘을 알기나 하는 것마냥 붉은 자태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a 복원을 위해 주춧돌 순서와 위치를 아라비아 숫자로 일일이 붙여놓은 돌 무더기가 개보수 작업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같다.

복원을 위해 주춧돌 순서와 위치를 아라비아 숫자로 일일이 붙여놓은 돌 무더기가 개보수 작업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같다. ⓒ 김정은

복원을 위해 주춧돌 순서와 위치를 아라비아 숫자로 일일이 붙여놓은 돌 무더기가 개·보수 작업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전화위복이라던가. 비록 절경은 감상하지 못했으나 연못 바닥이 보이는 세연지 덕분에 말로만 듣던 세연지의 과학적인 구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은 다섯에서 들어와 하나로 합쳐 셋으로 흘러가나니….

약 3000여 평 규모의 세연정. 이곳에 있는 계곡물을 저장하는 계담(溪潭), 계담의 물을 끌어들인 인공 연못, 인공연못과 계담 중간에 위치한 정자인 세연정을 모두 포함해 세연정이라 한다.

세연정 입구에서 동대와 서대로 나뉘며, 이 지역을 감싸는 토성이 보인다. 세연지와 회수담으로 구성된 연못의 계류바닥은 깨끗한 암반으로 돼 있고, 7개의 거암이 놓여 있다.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하류 쪽에 만들어진 높이 약 1m, 쪽 2.5m, 길이 약 11m의 판석보는 일종의 수중보 역할을 해서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여기에 노화도와 진도에 간척지 조성시 사용되었던 축조기술이 사용되었다.

a 인공연못 회수담으로 들어가는 각각의 수입구와 배수구 오입삼출을 알려주는 구멍들이 뚜렷하다.

인공연못 회수담으로 들어가는 각각의 수입구와 배수구 오입삼출을 알려주는 구멍들이 뚜렷하다. ⓒ 김정은

그러나 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 것은 세연정 북쪽 회수담과 연결되는 곳에 선명하게 뚫려 있던 수입구였다. 보통 오입삼출(五入三出)이라 부르는 이 구조는 판석보로 막은 계담의 물이 건너편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빨리 유입되고 일정한 속도로 나가도록 수량을 조절함으로써 연못 속의 수면을 고요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물은 막힘 없이 흐르다가 다섯 갈래로 흘러들어가 잠시 때를 기다리다, 다시 하나로 합쳐져 제 길로 흐른다. 또 천천히 나갈 때를 스스로 알아 세 갈래로 흘러간다.

문득, 때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연못의 작은 물도 들어가고, 나오고, 머무는 때를 알아 연못의 수면을 고요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인간은 왜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하기야 인간들이 그런 이치를 안다면 인간답게 복닥거리며 사는 맛도 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어부사시사에서는 윤선도가 꿈꾸던 완벽한 도원경이 펼쳐져 있다.

"취(醉)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신선경(神仙境)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
윤선도/ 어부사시사 춘사(6)


시조 밖에서 천재가 꿈꾸던 이상향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던가? 마음 속에는 개혁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으나 정치판 속에서 스스로의 야심을 펴보지 못한 불우한 천재가 스스로의 부와 노력 그리고 재기로 일군 이상향 부용동.

그러나 동대, 서대에서 하늘 하늘 춤추던 무희의 연못에 비치는 실루엣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유별난 심미안과 그만의 독특한 천재성은 평상시 그가 꿈꿔왔던 완벽하고 아름다운 원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땀 냄새 질펀 풍기는 인간의 살냄새가 부족한, 그만의 이상향으로 머물렀다는 점에서 아쉽다.

혹 이 느낌이 섬주민들로 하여금 세연정을 불태우게 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도대체 이 나라의 기운을 막는다고 북한산 등 전국 명당자리마다 쇠말뚝을 박은 일제 만행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이 남도의 외딴 섬, 보길도에서도 이 강토의 기운을 막고자 일제시대 때 비겁하게 지었다는 넓은 공립학교가 이름만 바뀐 채 초등학교 건물로 둔갑해 있다.

무언가 깊은 곳에서부터 치받쳐오르는 껄그러움을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자동차는 보다 깊고 은밀한 그만의 사저인 낙선재 집터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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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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