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62

등록 2004.03.29 15:24수정 2004.03.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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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는 나흘 뒤에 도착했다. 백여 명의 전 주민들과 함께였다. 그 밖의 주민들도 소식을 띄웠으니 머잖아 속속 돌아올 것이었다.


그는 자기 땅을 되찾았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이제 이 땅을 전보다 더 기름지게 가꿀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딜문은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고 주민들은 늘 쌀밥과 고기를 먹을 것이었다. 대장간도 세워 농기구를 만들면 대월씨국까지 사러가는 수고도 덜고 또 무기까지 만들면 다시는 그 누구도 침탈하지 못할, 검은머리 사람들의 강한 제후국이 될 것이었다.

제후는 은 장수의 말을 빌려 타고 마을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되찾은 영토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자기 감격을 더 한층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실망했다. 오순도순 정답게 앉았던 집들, 햇살 바르던 마을이 온통 불타거나 폐허가 되었고 멋지게 지어 올렸던 곳간마저 파괴되어 있었다. 양 우리들도 불이 타 짐승들은 그슬린 채 죽어 있었고, 그 토록이나 기름졌던 들녘은 더러운 짐승 내장과 쓰레기로 덮여 썩은 냄새까지 풍겼다.

'이게 아니야, 이게….'
감격으로 벌렁거리던 그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갔고 그 자리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딜문은 우리의 요람이었어. 비록 야만인들이 살다 갔다 해도 둥지는 남아 있어야 하잖아. 한데 이것은 마치….'

이 땅을 빼앗겼을 당시엔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고 우리마다 양들이 넘쳐났다. 그 곡식을 모르는 천하의 야만인들도 주민들은 회치듯 죽였지만 곳간은 잘 보존하더라고 들었다. 그런데 곡식을 중히 여기는 자기 동족들이 식량은 물론 그 모든 것까지 가리지 않고 불태워 버린 것이다!


식량마저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만 화가 치밀었다
'곡식까지, 곡식까지 불태우다니!'
치밀어 오른 화는 부글부글 끓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잘 지켜달라고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불을 지르다니!'

제후는 말머리를 팽이처럼 홱 돌렸다. 가서 따져야 했다. 딜문을 구해달라고 했지 누가 파괴하라 했느냐고, 이러고도 당신들이 승전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나에게 딜문을 되찾아 줬다고 공치사할 수 있느냐….


그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참모진들의 집무실은 적장의 집 뒤채에 있었다. 불타지 않고 유일하게 남은 그곳이 그들의 임시 집무실이었다. 마을을 회쳐 놓고도 그들은 마을을 다스린다고 그렇게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화가 났을 때 그의 뜀박질은 흡사 몽둥이로 땅을 치듯이 팡팡 울려댔다. 그는 그렇게 퉁퉁거리고 들어가 왈칵 문을 열었다. 그리고 대뜸 언성부터 높였다.

"어찌 그렇게도 낱낱이 파괴했습니까?"

그는 첫말부터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에서 부글거리던 화가 저 먼저 속사포처럼 튀어나간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면에 앉아 있던 에인이 의아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대체 왜 모두 불태웠냐 말입니다."
에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전쟁이 그런 것 아닙니까."
"제가 곡식창고를 일러주지 않았습니까? 한데 모두 불태워버려서 곡식들이 다 날아간 것이 아닙니까? 더욱이 그 불길에 수백 마리의 양들마저 질식해 죽었다니 이제 우린 어쩐단 말입니까?"

에인은 기가 막혔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전쟁에 몹시 충격을 받아 모든 업무를 강 장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날 참이었는데 그 전쟁을 일으킨 당자가 와서 화부터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에인은 차근차근 대답했다.

"제후께서 일러주신 곡식창고는 그들의 무기고였습니다. 그걸 태우지 않은 바람에 자칫 우리가 당할 뻔 했습니다."

그날 밤 주민들은 바로 그 건물에서 칼을 꺼내 무더기로 몰려왔다. 더 많은 남자들이 그 건물로 달려갔을 때 에인의 군사들이 불태워 버린 것이었다. 제후가 미리 주의를 주었고 그래서 에인 역시 이 보존하려고 했던 그 곡식창고는 그새 무기고로 개조되어 있었던 때문이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원주민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들이 잘 아는 구조를 그대로 보존했을 리도 없었다.

"이제 어쩐단 말입니까? 주민들은 속속 돌아올 텐데 그들은 어디서 발 뻗고 잔단 말입니까?"

제후는 계속해서 징징댔다. 에인은 문득 자신들이 너무 많은 가옥까지 불태웠다는 것이 떠올랐다. 따라서 제후가 투덜대는 것은 주민들의 보금자리가 없어진 때문이라 싶었다. 백성의 의식주를 걱정하는 것이 치자의 근본도리라면 제후는 지금 당연한 항의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에인은 정중하게 말했다.

"가옥은 내일부터라도 군사들을 동원해서 보수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동원할 기천명의 군사들은 그럼 무얼 먹인단 말이오?"
그때 강 장수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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