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의 야구가 공존하는 야구팀은 없다?

[태우의 뷰파인더 11]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소통하기

등록 2004.03.29 18:26수정 2004.03.30 09:0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태우

지난 2년 동안 사회인 야구 활동을 했다. 야구를 한다는 생각에 설레며 일요일을 기다렸고, 어린 시절처럼 글러브와 배트를 들고 운동장으로 향하는 걸음은 즐거웠다.


삼진을 연이어 당한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일주일 내내 화장실 거울을 보며 타격자세를 수정했고, 장타를 날린 날엔 그 순간의 ‘손 맛’을 떠올리며 행복해 했다. 공이 배트를 맞고 허공을 가를 때, 배트를 타고 온 몸으로 느껴지던 그 순간의 전율로.

봄이 왔고 사회인 야구의 시즌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야구를 하지 않는다. 내 방 옷걸이에 잘 세탁이 된 유니폼만이 덩그러니 걸려있을 뿐이다. 우리 팀의 이름은 가장 절친한 친구를 부르는 은어, ‘버디’(Buddy)였다. 하지만 야구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 ‘소통하지 못했다’. 그게 야구팀 해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야구팀 창단은 2년 전 한 친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동창인 우리는 모두 다 야구광이었다. 박철순과 김우열, 김일권과 김봉연, 하기룡과 이종도, 이해창과 김재박, 이만수와 이선희… 좋아하는 팀은 모두 달라지만, 그 시절 우리의 우상은 프로야구 선수였고 우리의 꿈은 야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버디’ 창단의 씨앗은 이미 오래 전부터 파종되어 있었다.

하지만 야구를 시작한 후,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추억을 공유하며 시작한 야구는 분명 하나였지만, 막상 야구를 하면서 느낀 것은 9명에게 ‘9개의 야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친구에겐 야구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었고, 어떤 친구에겐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또 어떤 친구에겐 ‘친구들과 자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고, 또 어떤 친구에겐 ‘체력 단련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 모두를 합친 것이 야구의 전체적인 의미가 되겠지만, 9명 모두 각각 다른 자신만의 비중을 두는 부분이 있었고, 미묘한 차이를 가진 ‘자신만의 야구’가 시시때때로 충돌했다.

김태우

모두 다 자신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지만,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불참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더구나 참석할 수 없다는 전화도 제대로 해주지 않아, 선수가 비어서 포기하는 경기가 종종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야구를 다른 친구에게도 ‘강요하려고 하면서’ 생겨났다. 감독을 맡았던 친구는 반드시 이기는 야구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친구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나는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근사한 야구팀은 이기는 야구팀이 아니라, 9개의 야구가 공존할 수 있는 야구팀이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난 후 열린 뒤풀이에서 9개의 야구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이데아’라고 했다. 이 세상에 그런 야구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난 9개의 야구를 존중하지 않는 그들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이기는 야구에 전념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야구는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버디의 전력은 10번 싸우면, 8, 9번은 지기 일쑤였고 지는 날은 공연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스트레스를 풀고 친목을 도모하려고 했던 야구가 오히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두 번째 시즌이 시작될 무렵, 팀원의 절반 정도가 야구를 그만두고 나갔다. 나는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9개의 야구에 대해 다시 말을 꺼냈다.

한 친구는 캐나다에서 사회인 야구를 한 적이 있는데, “타격을 잘 못하는 선수가 나오면 일부러 공을 약하게 던져준다. 서로 즐기기 위해 야구를 하는 것이 목적이며 이기고 지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도 즐기면서 야구를 하자”고 주장했고, 감독인 친구는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야구할 필요도 없다. 경기를 하면서 이기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말했다. “서로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야구를 강요하지 말자”고. “상대방이 추구하는 야구를 그저 인정해주자”고. 하지만 이번에도 “9개의 야구가 공존하는 야구팀은 없다”는 주장을 친구들은 되풀이했다.

인생을 살면서 종종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이 충돌하는 현상을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내 안에서도 목격하게 된다. 과연 이상을 지키며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나는 때때로 헛갈린다. 불협화음으로 야구팀을 해체하면서 내 마음 속에는 “9개의 야구가 공존하는 야구팀은 없다”는 친구들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김태우

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정말 그들의 말처럼 내 생각은 지독히 이상적인 것일까.

현실적인 문제에 잘 대응하는 듯한 친구의 말투를 들으며 나는 그들이 이미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3명만 모여도 친구와 적이 생기는 게 사람이다 보니, 무려 9개의 야구가 공존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9개의 야구를 존중하는 팀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면, 조금이라도 서로를 더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토대 위에서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다가오는 선택의 문제 앞에서 나는 가끔 고민한다. 이런 내 이상이 잘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지, 아니면 순순히 현실이 정해놓은 트랙을 따라 달려야 하는지.

작은 사회였던 우리 팀 ‘버디’에서 이상과 현실의 이름으로 갈라진 친구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봄이 온 3월, 혼자 거리를 걷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야구를 했던 그 햇살 속의 그라운드가 그립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쌍방울 법인카드, 수원지검 앞 연어 식당 결제 확인 [단독] 쌍방울 법인카드, 수원지검 앞 연어 식당 결제 확인
  2. 2 악취 뻘밭으로 변한 국가 명승지, 공주시가 망쳐놨다 악취 뻘밭으로 변한 국가 명승지, 공주시가 망쳐놨다
  3. 3 명태균, 김영선에게 호통 "김건희한테 딱 붙어야 6선... 왜 잡소리냐" 명태균, 김영선에게 호통 "김건희한테 딱 붙어야 6선... 왜 잡소리냐"
  4. 4 "김영선 좀 해줘라"...윤 대통령 공천 개입 정황 육성 확인 "김영선 좀 해줘라"...윤 대통령 공천 개입 정황 육성 확인
  5. 5 북한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 윤석열 정부가 감춘 것 북한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 윤석열 정부가 감춘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