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님! 생선장시 왔응께 후딱 나와보싯쇼"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53]그 시절 산골 사람들이 생선을 맛보던 방법

등록 2004.03.30 16:50수정 2004.03.3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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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힘든 고갯길을 넘나들던 생선장수. 키와 체, 밥상, 바구니, 소쿠리, 나중 버스를 타고 화장품 장사도 많이 왔다 갔습니다.
저 힘든 고갯길을 넘나들던 생선장수. 키와 체, 밥상, 바구니, 소쿠리, 나중 버스를 타고 화장품 장사도 많이 왔다 갔습니다.김용철
처갓집과 오지 전북 장수군 오일장 생선


시골 처갓집 어른들을 찾아 뵙는 게 자식노릇 제대로 하는 첫째고, 뵐 때마다 젊은이가 어른들 농사일을 돕는다면 더 기쁘다. 명절 두 번 빼고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도록 밑천을 차곡차곡 쌓아가도록 하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설과 추석 때를 포함 연중 예닐곱 번은 찾아 씨암탉까지 얻어먹고 좋아하는 나물반찬 골고루 먹어보는 즐거움은 그 다음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터라 어른들 살아 계실 때 더 찾는지도 모르겠다.

"생선이나 뭐 좀 사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냥 가자구요. 아무 것도 사지 말고 오라고 하셨어요."
"명색이 사윈데 빈손으로 가면 안 될텐데…."
"마침 오늘 장날이니 한 번 들렀다 갈래요?"
"장인도 계시니까 잠깐 내립시다."

고기는 물론이고 파, 마늘, 양파, 부추, 달래를 안 드시는 장모님이지만 장인께는 한두 가지 들고 가는 게 예의다. 장수읍 시장에 들렀다. 규모는 조금 작아 보이나 좌판이 죽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있을 건 다 있을 성싶었다.

술 한 병과 고기 두세 근, 생선 한가지는 사가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 시장 구경 겸 명절기분 내려고 돌아다녀 보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종류별로 황급히 사서 서둘러 빠져 나오고 말았지만 미리 준비해 올 걸 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후회 막급이다. 첫 번 째 방문 때의 경험이다.

처갓집 장수군 장수읍(邑)에 가서 시장에 있는 생선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열불'이 난다.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이 작은 생선 때문이다. 작으면 깊은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기실 먹어보면 이건 조기인지 피라미인지 모르겠고 꽁친지 송사린지 모르겠다. 명태도 그렇고 갈치 등 생물과 얼린 것, 건어물 전에 가보아도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자동차 보급대수와 보급률에서도 최하위를 차지하게 된 이곳의 경제력과 무진장으로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 중 무주는 대전 생활권에, 진안은 전주권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지만 장수군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고립을 면치 못한 지리적 여건에 기인한 바가 크다.

백두대간의 허리쯤인 이곳은 북동쪽으론 덕유산(1614m), 육십령(六十嶺 734m) 아래로 백운산(1279m)을 거쳐 남동쪽 지리산(1915m) 종단 축에 위치하고 서쪽엔 마이산(667m)에 막혀있다. 1200m대 산으로 둘러싸여 금강(錦江)의 발원지 노릇이나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진장 고원은 농사 짓는 평지가 해발 평균 500m가 넘으니 물자 유통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전국이 고속도로에서 고속철 시대 한나절 생활권으로 넘어가는 현 시점에서도 고랭지 채소도 대도시로 먼저 나갔다 다시 내려오는 까닭에 온전한 걸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4~5년 동안 지켜보아도 개선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나마 있던 상권도 이젠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흡수되어 존폐 위기에 처해 있다.

화순 북면 백아산(810m) 일대도 그랬다. 지금이야 휴양림도 생기고 화순온천이 들어서 자장면 집 몇 개와 가든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엔 전라남도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광주를 거쳐 순천·여수 방향 또는 나주·목포 방향으로 갈 때마다 화순은 지나치지도 않던 오지에 불과했다.

내 고향보다 더 궁벽한 곳이 장수군이다. 화순군이랬자 여수에서 순천을 거쳐 육로로 달구지에 실어 오거나 목포에서 뱃길로 영산포를 거쳐 다시 육로 수송을 할 수 있기까지 하루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었던 반면 장수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26번 국도를 따라 유일한 길 군산-익산-김제-전주-완주-진안을 넘고 장수까지 오려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영남에서 오기란 더 어렵다.

요즘은 안동간고등어가 별로 짜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짜지 않다고 선전을 하니 말입니다. 간 고등어 본래 맛은 짜야 맛인데...
요즘은 안동간고등어가 별로 짜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짜지 않다고 선전을 하니 말입니다. 간 고등어 본래 맛은 짜야 맛인데...김규환
간고등어가 어디 안동(安東)뿐이었을까?

그렇다면 2~30년 전이나 조선시대,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생선 맛을 보았을까? 그 원류를 찾는 과정은 그리 힘들지 않다. 한가지는 안동 간고등어에 있고 또 하나는 함지박과 함석 또는 스테인레스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산을 넘던 아주머니들의 발 품에 있었다.

먼저 안동 간 고등어를 보자. 궁궐에서 산해진미를 맛본 양반네들 아닌가. 그들이 낙향하면 나물반찬 뿐인 양반골 안동, 예천 등 경북내륙 지방에 박혀 있다보면 입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생선 맛보러 말 타고 내달린들 무슨 소용인가. 아랫것들을 족쳐서 몇 날 며칠이고 다녀오라기엔 비용이 만만찮고 체면도 말이 아니다.

달구지가 주요 유통수단이 되기 전에는 뱃길이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으나 배로 거슬러 오르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선인 지게로 나를 수밖에 없다. 영덕 앞바다에서 30리를 거쳐 또 30리 그렇게 수회 반복하면서 내를 건너고 고개를 오르다보면 고등어를 생물로 옮긴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고등어에 굵은 소금을 팍팍 뿌려 간을 듬뿍 해서 세월아 내월아 하며 목적지까지 도착하고 보면 짜디짠 소금에 절여도 겨울 한 철을 빼고는 군중 내가 풀풀 나는 상하기 직전의 맛 간 생선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적당히 물기가 마른 생선을 절기 상 놋그릇을 꺼내 쓰던 백로(白露)부터 한식(寒食)까지의 서늘한 기온에서는 한번 들여오면 소금단지에 파묻다시피 소금을 뒤집어 씌워 두 달이고 석 달이고 두고두고 먹어도 되었으니 생활의 불편함보다는 조상들의 지혜가 발휘되는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줘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간고등어는 안동지방에만 국한된 음식이 아니었다. 바닷가 몇 마을이나 생물로 회도 떠먹고 국을 끓여 바로 신선한 생선을 맛보았을 뿐이다. 어릴 적 우리가 먹던 생선은 냉동이나 냉장(冷藏)이라기보다 염장(鹽藏)이었다.

소금을 저장해뒀던 항아리 단지에도 파리 떼 접근을 막기 위해 얇은 천이나 모기장을 씌워 놓았다. 소금과 진배없는 생선에서 썩은 국물이 흐를 리 없고 다만 짜기만 할 뿐 맛도 변질이 없게 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홍어를 21세기에 처음 대하게 됐다면 어찌 되었을까?

홍어(紅魚)를 보면 확연하다. 가장 빠른 운송수단이었던 수운(水運)도 목포(木浦)에서 영산강 뱃길 100리(40km)를 저어 나주 영산포(榮山浦)에 이르면 최소 열 여덟 시간에서 하루 꼬박 소요되었다. 소형선박은 말해 무엇하리요.

그러다 보면 일부러 삭힐 필요도 없이 활어(活魚)였던 것이 곧 선어(鮮魚)가 되고 일사천리로 건어(乾魚)가 되면 아무 하자가 없겠지만 기온 상승을 버텨내지 못하고 상어(傷魚) 또는 상선(傷鮮)으로 곯아 간다. 누군들 거들떠보지도 않은 상한 상태가 되고 마니 버림받은 처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요즘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고발조치 당할 것이고 따라서 그 시절의 교통 여건이 아니었다면 그 맛난 발효 식품은 칠레에서처럼 퇴비로나 썼을 일이다.

하지만 발효식품의 천국, 종주국에 살았던 우리 겨레만의 특별한 혜택인가. 선조들이 발효과학을 덧씌워 만들어낸 것이 삭힌 홍어 요리가 되었고 기호에 따라 그 정도를 더해가며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영산포에 도착한 홍어는 대부분 홍어 도매상을 거쳐 전남·광주 일대로 퍼져나갔다. 그마저 소비가 더디면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숨까지 쉰다는 항아리 속에 발효균이 많은 지푸라기와 함께 저장하여 일등 식품으로 잔칫상에 올려지고 저 멀리 임금님 수랏상에도 올랐다. 드라마 대장금에도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생선회로는 딱인듯 싶다"며 효능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시골 사람들 소통의 장소 골목 또는 고샅길 그리고 사립문
시골 사람들 소통의 장소 골목 또는 고샅길 그리고 사립문김규환
등짐장수, 봇짐장수 그리고 교통과 도시의 발달

이제 머리에 이고 생선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의 수고로움을 말해야겠다. 남성 중심의 지게꾼 등짐장수 부상(負商)과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보상(褓商)을 일컬어 부보상(負褓商 또는 보부상 褓負商)이라 한다. 그 중 봇짐을 꾸려 먼길을 떠나는 상단(商團) 가운데 보상(褓商) 생선장수의 일상을 따라다녀 보았다.

그 험난한 여정을 살펴보자.

조선시대는 안성의 놋그릇 유기(鍮器), 담양 죽세공품(竹細工品), 남원 상과 제기(祭器), 안동포와 곡성 돌실나이, 서천 한산모시, 영광굴비 등 전국 각지의 특산물은 육로를 따라 남부지방 산물은 조치원 서창(西倉)에, 대관령 동쪽 산물은 홍천 내촌면 동창(東倉)을 거쳐 한강 마포나루인 현재의 창전동(倉前洞) 광흥창(廣興倉)에 모여 관리의 녹봉으로 쓰이든가 운종가(지금의 종로)에 진열되어 팔렸는데 대체로 바닷길과 뱃길이 운송 수단이었다.

1899년 경인선,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 1930년대 전라선, 1940년대 중앙선 개통으로 철도 시대가 도래해 웬만한 물자가 철도로 순식간에 운반되기 전까지는 과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인구가 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2~3만의 도시인 부(府)가 생겨났다. 여수, 목포, 군산, 소래, 속초, 주문진, 묵호, 포항, 마산 등 포구가 있는 항구의 산물은 서울, 부산, 인천, 광주, 대구, 청주, 대전, 평양, 개성, 해주, 신의주, 청진 등 상업이 활발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도시 기준으로 보면 획기적인 변화였으나 육로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축에 놓이지 않은 곳이면 예전 상황을 면치 못하는 척박한 수준이라 우마차가 맘대로 달릴 형편도 아니었다.

여기에 고달픈 여정이 오래 지속될 소지를 안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이를 어쩌겠는가. 비포장 소로(小路)마저 일제 수탈의 대상이던 쌀과 목재, 광산지역에 집중되었으니 웬만한 곳은 현재의 임도(林道)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도 이정표 나침반 없이 물어물어 찾아 나선 고갯길

1960년대와 70년대는 인구 증가와 그로 인한 피폐한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촌 인구가 급격히 이동하던 시기였다. 이 때 아주머니 행상(行商)들은 그 숫자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세상에 하늘로 향하는 곳에 길이 있고 마을도 있다. 그곳을 찾아 무작정 나서는 것이다. 도매금으로 물건을 떼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라 중간 상에게 웃돈을 주고서라도 둥그런 양철로 만든 가벼운 함석 용기에 담아 시골로 시골로 발길을 옮긴 긴 여정에 돌입한다.

처음엔 오일장 근처로 나가보지만 텃세가 심한 탓에 쉬 발붙이지 못하고 맞아 죽기 십상이니 장에서 먼 거리를 찾아 골짜기로 터벅터벅 걷는다. 지도나 이정표 나침반도 없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고개를 넘고 저 내를 건넌다. 간신히 한 마을 찾아 팔아보려 하지만 첫 나들이가 그리 쉬울까.

봄가을엔 농번기라 사람도 없고 여름엔 김매느라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겨울엔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가니 쌈짓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 만나기 하늘에 별따기다. 논두렁에서 일하는 아줌마를 불러 보면 돈이 없다하질 않은가. 또한 마을 어귀에서 일나가는 사람 붙잡거나 잠시 새참 가지러 오거나 쇠죽 퍼 주러 오는 사람을 접하면 횡재할 가능성이 커 단박에 해치우고 고생길 얼른 마감하고 돌아가련만….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게 길이다. 한 길로 쭉 뻗어 있으면 좋으련만 삼거리가 있고 가다가 막히는 곳도 더러 있다. 내리막 길 조금 걷다보면 가파른 언덕길 자주 나오니 오르락내리락 반복을 하면 심심치는 않을 것이지만 고갯길 산길 넘다보면 얼마 못 가 땀에 절고 힘에 겨워 쉬어감이 순리지만 그 무거운 짐을 다시 들어올릴 생각을 하면 쉬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뛰어가는 토끼 한 마리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꿩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간이 오그라든다.

아주머니 손엔 꼭 똬리가 들려 있었지요. 아주 먼 옛날 이야기 입니다.
아주머니 손엔 꼭 똬리가 들려 있었지요. 아주 먼 옛날 이야기 입니다.김용철
첫 마을에서 허탕 치고 다시 길떠나는 아낙

간신히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옹기종기 30여 호 모여있는 마을이 보인다. 맨 몸으로 산행을 할 때도 오르기보다 내려오는 길이 더 팍팍한 것처럼 발바닥과 무릎에 통증이 심하다. 이 때쯤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냥 돌아갈 생각마저 들었던 먼길이다. 배꼽 시계로 보아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걸 보면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듯 하다.

동네는 평소 보던 대로 초가집 대부분에 기와집 한두 채 있을 뿐이다. 첫 집 앞에 다다라 사립문을 통해 기웃거리니 삽살개가 컹컹 짓는다. 장사를 다녀보면 힘들여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되니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니다.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섞어 만든 대문을 열고 주인이 손님을 맞는다.

"어디서 오셨소?"
"일단 이 짐 좀 받아 주실라요?"

"휴-"

아주머니는 긴 숨을 내뱉고 허리를 한 번 쭈욱 펴고 나서 짐을 풀 채비를 하였다. 간간이 사람을 만났을 뿐 첫날 첫 대면이라 생각같이 많이 팔리지 않았다.

"글면 나중에 사싯쇼. 머리에 다 좀 이여 줄라요?"
"미안허요."
"끄응"

똬리를 얹고 머리에 이자마자 옆 마을을 향해 서둘러 길을 떠난다. 길이라 해야 신작로도 아니고 논두렁 사이로 난 혼자나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돌부리를 피해 잡고 있던 한 손마저 놓고 뒷짐을 지고 쫄래쫄래 잘도 간다.

길 떠나기 전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분명 "위쪽에도 사람들이 산다"고 했다. 다시 길을 떠났다. 화순 이서면을 일부 통과하고 북면으로 접어들어 구수리, 옥리, 서유리, 맹리, 갈전리, 남치리를 거쳐 원리에 이르는 길은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하지만 원리는 25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인지라 거지, 동냥치, 벙어리, 소경, 난봉꾼 등 잡다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짐을 내릴 생각을 못하고 백아산을 오른쪽에 끼고 좁은 골짜기로 접어든다.

갈치 세 마리에 500환, 고등어 한 손 100환

앞으로 팍팍한 오르막 십리 길을 가던 중에 복조리 마을 송단리가 있다. 오리쯤 물길 따라 더 오르면 양지마을이 있다. 열댓 가구 있는 평지나 방촌까지 가면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마을을 지나치다시피 했다. 산골마을 치고 적당히 너른 들이 펼쳐진다. '이 마을에서 떨어버려야 할 것인디….'

방리 양지마을에 들어서니 60여 호나 되는데 집들이 대체로 커 보였다. 아마도 인공(人共) 때 몇 번이나 불에 타서 새로 지었는가 보다. 마을 한가운데 한 집을 찾아드니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다.

"짐 좀 내려주싯쇼."
"아따 허벌나게 무겁구만이라우. 창평에서 오셨소?"
"아녀라우 광주에서 왔당께요."
"아이고 그 먼데서 이 짐을 이고 오실라면 새벽밥 묵어도 힘들 것인디…."
"오다본께 여기까장 오고 말았당께요. 오다가 주먹밥 먹었어라우."

아주머니는 서방에서 오셨다고 했다. 면식이 없는 터라 옥과나 방석굴장에서 온 건 아니라 짐작하고 창평에서 왔을 걸로 봤지만 초보 아주머니는 무등산을 넘고 식영정, 소쉐원을 거쳐 독수정원림을 지나 담양 남면을 거쳐 화순 북면으로 접어들어 열댓 마을을 거쳤건만 절반도 팔지 못하고 여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마을이 거의 끝이고 두세 시까지 떨이를 하지 못하면 돌아가기도 난감하다. 천상 헐값으로 처분하든가 누가 동네방네 모아 놓고 판을 만들어 주면 좋으련만….

"저… 뭣 사실라요?"
"아따 뭣뭣 갖관는가 구경이나 좀 허십시다. 보자기 좀 열어봇쇼."
"갈치, 고둥어, 명태, 꽁치…."
"갈치허고 고등어 얼매라요?"
"마리 당 갈치는 200환인디 세 마리 사면 500환에 드릴라요. 글고 고등어는 한 손에 100환이라우. 오늘 새벽에 바로 떼각고 뽀로 왔응께 아직은 싱싱헐 것이요."

어머니는 갈치가 기본이다. 세 마리 사면 봄날엔 무를 넣고, 하지가 될 무렵에는 감자를 도톰하게 잘라 끓이다가, 한 여름엔 호박으로, 찬바람이 불면 다시 무로 끓이셨다. 갈치조림을 끓이고 소금 항아리에 넣어 뒀다가 하나 씩 꺼내 석쇠에 올려 아궁이 불에 노릇노릇 구워 내면 한 토막에 절반만 있어도 물 말아 한 그릇 뚝딱 치우게 하는 비린내 모르고 맛나게 먹던 생선이다.

유달리 등이 푸르던 고등어는 두고두고 먹을 요량으로 세 마리를 샀다. 매콤달콤한 고추장을 듬뿍 발라 느긋하게 구워내면 오랜만에 입맛을 돌게 했다. 꽁치와 황석어는 한 보따리 덜어냈다. 어머니는 몸빼 아래 춤에서 꼬깃꼬깃 접어 둔 1백환 짜리 아홉 장을 꺼내셨다.

70년대 초중반의 한 마을. 생선장수 아주머니는 사람사는 동네가 먼발치에 보이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70년대 초중반의 한 마을. 생선장수 아주머니는 사람사는 동네가 먼발치에 보이면 얼마나 기뻤을까요?김규환
골짜기 마을 아낙들의 후한 인심 덕에 단박에 생선을 다 팔았지만…

"여깄소. 글고 가만있어 보싯쇼잉. 시방 유제 갔다 올텡게. 이래각고 해 넘어 가도 다 못 팔겄소."
"글면 얼마나 좋겠수."
"긍께 주섬주섬 싸서 동각 앞으로 가십시다."

어머니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힘겨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못 도와줘서 안달이셨다. 아직 남은 생선이 있음에도 가지가지 사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장날 기다리기도 뭐하고 널린 일을 놔두고 하루를 허비하고 장에 갈 수 없는지라 이 때 팔아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에 미쳤는지도 모른다.

당신도 아버지 따라 산 지 20여 년 되는 동안 남편에게 당한 설움, 피난살이에 가세가 기울자 논밭뙈기 한 평 없이 십여 년을 버티기도 했지만 알뜰살뜰 살다보니 곧 아이들이 커서 다시 논밭 마지기나 살 형편이 되어가니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거시기 엄니!" "거…아짐, 좀 나와보싯쇼." "성님 생선장시 왔당께라우" 하고는 아주머니 곁으로 다시 가보니 어느새 사람 숫자가 불어 있었다.

"자 다들 구경만 허지 말고 싸게싸게 고르더라고."

입담 좋고 좌중을 아우르는 능력이 탁월한 육남이 어머니 한 말씀에 다들 몰려드니 함지박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잡이 한 명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아따, 지비 드릴 건 있응께 걱정 붙들어 매고 찬찬히 고르더라고."
"근디 수산땍 성님!"
"뭣땜시 불렀당가?"
"돈 좀 춰줄라요(빌려 줄래요)? 보쌀배끼(보리쌀밖에) 없어서…."

남들이 나온 터에 같이 나온 젊은 아주머니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조기라도 한 마리 사서 신랑에게 주고 싶은가 보다.

"남개댁은 아까침에 샀다 그랬제? 모다 멀뚱멀뚱 쳐다보지만 말고 우리 동네에서 다 사주자고…. 갈 길이 백리가 넘은께."

그렇게 해서 생선 아줌마의 긴 하루는 마감을 했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수 차례 남기고 네 시가 되기 전에 꾸깃꾸깃한 몇 천 원에 쌀 몇 되, 보리쌀 몇 되를 다시 이고 마을을 떠났다. 머리가 아픈 것은 아무 일도 아니고 목이 뻐근해져 오는데도 어떻게든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쉽게 돈 되는 걸로 바꿨으니 성공적인 하루였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기분 좋게 어떻게든 다 팔았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다. 신발값을 당해낼지도 모르고 얼마나 높고 먼길을 찾아 헤매야할지도 모르는 긴 여정의 시작이다. 골고다 언덕보다 더 험한 고통의 고개를 언제까지 넘어야 할까. 못된 남정네들 농짓거리만 없어도 괜찮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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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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