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사람들 소통의 장소 골목 또는 고샅길 그리고 사립문김규환
등짐장수, 봇짐장수 그리고 교통과 도시의 발달
이제 머리에 이고 생선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의 수고로움을 말해야겠다. 남성 중심의 지게꾼 등짐장수 부상(負商)과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보상(褓商)을 일컬어 부보상(負褓商 또는 보부상 褓負商)이라 한다. 그 중 봇짐을 꾸려 먼길을 떠나는 상단(商團) 가운데 보상(褓商) 생선장수의 일상을 따라다녀 보았다.
그 험난한 여정을 살펴보자.
조선시대는 안성의 놋그릇 유기(鍮器), 담양 죽세공품(竹細工品), 남원 상과 제기(祭器), 안동포와 곡성 돌실나이, 서천 한산모시, 영광굴비 등 전국 각지의 특산물은 육로를 따라 남부지방 산물은 조치원 서창(西倉)에, 대관령 동쪽 산물은 홍천 내촌면 동창(東倉)을 거쳐 한강 마포나루인 현재의 창전동(倉前洞) 광흥창(廣興倉)에 모여 관리의 녹봉으로 쓰이든가 운종가(지금의 종로)에 진열되어 팔렸는데 대체로 바닷길과 뱃길이 운송 수단이었다.
1899년 경인선,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 1930년대 전라선, 1940년대 중앙선 개통으로 철도 시대가 도래해 웬만한 물자가 철도로 순식간에 운반되기 전까지는 과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인구가 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2~3만의 도시인 부(府)가 생겨났다. 여수, 목포, 군산, 소래, 속초, 주문진, 묵호, 포항, 마산 등 포구가 있는 항구의 산물은 서울, 부산, 인천, 광주, 대구, 청주, 대전, 평양, 개성, 해주, 신의주, 청진 등 상업이 활발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도시 기준으로 보면 획기적인 변화였으나 육로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축에 놓이지 않은 곳이면 예전 상황을 면치 못하는 척박한 수준이라 우마차가 맘대로 달릴 형편도 아니었다.
여기에 고달픈 여정이 오래 지속될 소지를 안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이를 어쩌겠는가. 비포장 소로(小路)마저 일제 수탈의 대상이던 쌀과 목재, 광산지역에 집중되었으니 웬만한 곳은 현재의 임도(林道)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도 이정표 나침반 없이 물어물어 찾아 나선 고갯길
1960년대와 70년대는 인구 증가와 그로 인한 피폐한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촌 인구가 급격히 이동하던 시기였다. 이 때 아주머니 행상(行商)들은 그 숫자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세상에 하늘로 향하는 곳에 길이 있고 마을도 있다. 그곳을 찾아 무작정 나서는 것이다. 도매금으로 물건을 떼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라 중간 상에게 웃돈을 주고서라도 둥그런 양철로 만든 가벼운 함석 용기에 담아 시골로 시골로 발길을 옮긴 긴 여정에 돌입한다.
처음엔 오일장 근처로 나가보지만 텃세가 심한 탓에 쉬 발붙이지 못하고 맞아 죽기 십상이니 장에서 먼 거리를 찾아 골짜기로 터벅터벅 걷는다. 지도나 이정표 나침반도 없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고개를 넘고 저 내를 건넌다. 간신히 한 마을 찾아 팔아보려 하지만 첫 나들이가 그리 쉬울까.
봄가을엔 농번기라 사람도 없고 여름엔 김매느라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겨울엔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가니 쌈짓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 만나기 하늘에 별따기다. 논두렁에서 일하는 아줌마를 불러 보면 돈이 없다하질 않은가. 또한 마을 어귀에서 일나가는 사람 붙잡거나 잠시 새참 가지러 오거나 쇠죽 퍼 주러 오는 사람을 접하면 횡재할 가능성이 커 단박에 해치우고 고생길 얼른 마감하고 돌아가련만….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게 길이다. 한 길로 쭉 뻗어 있으면 좋으련만 삼거리가 있고 가다가 막히는 곳도 더러 있다. 내리막 길 조금 걷다보면 가파른 언덕길 자주 나오니 오르락내리락 반복을 하면 심심치는 않을 것이지만 고갯길 산길 넘다보면 얼마 못 가 땀에 절고 힘에 겨워 쉬어감이 순리지만 그 무거운 짐을 다시 들어올릴 생각을 하면 쉬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뛰어가는 토끼 한 마리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꿩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간이 오그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