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힘으로 싹틔운 평화집회

촛불시위와 여성

등록 2004.04.07 14:56수정 2004.04.0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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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김희수

국회의 탄핵가결이 낳은 촛불시위는 민주화운동에서도 본격적으로 여성이 주역으로 떠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진보세력 속에서도 소수자의 입장이었던 여성들은 집회의 지도부이자 진행자로서의 면모까지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훗날 역사는 촛불시위를 여성이 민주화운동의 주류로 떠오른 계기가 된 사건으로 기록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역으로 떠오른 여성

탄핵가결 직후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그 소속단체들인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등 여성단체들은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며 탄핵 무효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 여성운동의 대표적인 진보단체들은 4·15 총선의 정치참여를 준비해오고 있었지만 ‘탄핵정국’을 맞아 일사분란하게 거리로 나가 ‘민주수호’를 외쳤다.

550개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 행동 준비위원회’(이하 범국민행동)에서 여성단체는 소수였지만 실질적인 지도부의 역할을 해냈다. 이 같은 역량은 이들 여성단체들이 지난 20여년 동안 쌓아온 민주화운동의 경험에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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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김희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과 여성노동자운동으로 발아한 진보적 여성운동은 1970년대 크리스챤아카데미를 통해 배출된 여성운동 1세대들이 이끌었다. 이번 촛불시위 때 참여하지 않은 보수여성단체들이 관변단체로 출발한 것과는 달리 이들 단체들은 비합법적인 임의단체, 이른바 재야단체로 출발해야 했다.

1980년 여신학자협의회가 출범한 것을 시작으로 여성민우회의 전신인 여성평우회(1983), 여성의전화(1983), 기독여민회(1986) 등과 민주화운동단체 내부에 여성조직이 설치되며 여성민주화세력은 조직화됐다.

80년 여신학자協 첫발, 민우회 기독여민회 등 줄탄생


여성이 민주화세력 내에 독자세력으로 떠오른 계기는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 이 사건을 통해 여성운동단체들은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반정부 투쟁에 뛰어들었다.

이 같은 여성단체의 민주화운동 참여는 1987년 진보여성단체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출범했다. 보수적 여성운동단체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중심의 여성계에 진보적 여성 대표단체가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6월 항쟁에서 여성은 하나의 세력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미완의 6월 항쟁의 뒷페이지’라는 탄핵무효와 부패정치 추방을 위한 촛불집회에서 여성들은 민주화 세력의 일부가 아닌 주역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20일 촛불집회 현장에서 최광기씨와 함께 3부 집회를 공동진행한 영화배우 권해효씨가 한 “오늘은 제가 (최광기씨에게)순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로 분담을 확실히 하고 나왔다”는 조크는 15일 동안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진 촛불집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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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김희수

촛불집회의 준비는 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여성단체가 각각 10여명씩 투입한 여성 상근활동가들이 도맡았고 준비위원회 언론홍보팀장을 맡은 김혜애 녹색연합 정책실장이나 이송지혜 민언련 모니터부장, 정은숙 여성민우회 사무국장 등이 맹활약을 펼쳤다.

집회 현장의 무대 위에서는 여성단체 행사의 단골 진행자였던 최광기씨가 스타로 발돋움하며 메인 진행자로 활약했고 여성학자 오한숙희씨와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정책국장과 황금명륜 기획국장 등은 수시로 임시 집회 진행자로 나섰다.

역대 집회와는 달리 촛불을 든 집회 군중이나 자원봉사자들도 절반은 여성이었다. 지난달 27일 마지막 집회가 있었던 광화문 현장에는 가족이나 연인들이 주류를 이뤘지만 친구들끼리 참가한 여성도 적지 않았다. 여대생들은 ‘바위처럼’ ‘불나비’ 등 민중가요에 맞춰 발랄한 춤을 춰 눈길을 모았고 재미있는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고 나온 젊은 여성들도 주변 참가자들의 눈길과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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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김희수

이처럼 여성들이 집회 현장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촛불집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중생 미선이 효순이 추모제에서 시작돼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 부안집회로 이어진 새로운 시위 형태인 촛불집회는 여성의 참여를 가능케 했다. 민주화를 외치던 가투(거리투쟁)는 곧 폭력의 장이었다. 공권력의 폭력적인 강제해산 시도에 맞서 시위대는 각목과 돌멩이를 던졌다. 여성참가자들은 진압 경찰에 의해 성희롱을 당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폭력적 가두시위 탈피...여성주도 평화분위기로 진화

평화로운 집회에 여성참가자들이 보다 많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지난달 27일 집회에 남편과 함께 참여한 손주희(36·회사원)씨는 “대학 시절 집회에 참여할 때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지만 촛불집회는 평화로워 주말마다 참석했다”고 말했다.

평화로운 집회문화는 여성참가자들을 늘린 계기가 됐지만 이는 곧 여성들의 공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집회를 정착시켜온 것도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2001년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가 폭력 없는 문화집회인 ‘건널목 시위’, 2003년 1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한국여성평화네트워크’가 촛불춤 반전평화 기원 시위를 하는 등 여성운동단체들은 평화로운 집회문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미선이 효순이 추모제, 부안집회 등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늘 여성들이 부각됐다. 그리고 이 같은 여성들의 참여는 폭력으로 반발을 사는 대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집회를 대중화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이는 곧 여성운동단체가 대중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탄핵무효 촛불집회’는 계급투쟁으로 출발해 정치세력화를 표방하는 현재까지 진화를 밟고 있는 여성운동의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주목된다.

촛불대열속 여성 부각, 진전된 민주의식 반영
집회문화속 여성 … 난 이렇게 본다

지난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된 이후 전 국민은 즉각적으로 촛불을 들고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국민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수구부패정치권의 도전은 유권자를 무시하고 진행된 만큼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라는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국민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공감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왔다.

유린당한 의회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이를 짓밟은 정치세력을 심판해야 한다는 공감과 공분으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유신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왔던 세대, 6월 항쟁 세대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의사소통을 신속하게 하고 있는 세대까지 각계각층 남녀노소가 참여 했다

이러한 국민저항의 대열에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며 역사의 현장에는 늘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탄핵무효와 부패정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공감으로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라는 사실이 새삼 주목을 받는 현실이 오히려 그동안 우리사회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변화는 여성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만큼 여성들에게 부당한 삶을 강요하는 사회와 의식을 변화시켜내는 일에 여성들이 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항상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은 정당하게 주체로서 평가 받기보다는 보조자적인 역할로만 평가받아 왔었다. 이는 여성단체들의 활동에도 적용되어 사회개혁 과제들에 대한 주도적인 활동들은 언제나 여성단체들과 분리되어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2004년 탄핵무효 부패정치 청산을 위한 촛불의 대열에 여성들이 부각된 것은 우리사회의 진전된 민주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전 국민적 저항을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열린 공간으로 운영한 촛불행사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의사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공간에 누구나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친구, 동료들과 참여할 수 있었다. 같은 생각으로 함께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은 자존심과 상실감을 서로에게서 치유받았고, 우리사회의 정치문화를 보다나은 방향으로 바꿔내는 힘이 주권자인 개개인들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민주교육의 장이었다.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알고 갈등 관리를 평화적으로 해왔던 여성들의 감성과 여성주의적 운동방식이 반영된 2004년 촛불행사에서 여성들이 부각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혜를 모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들었던 촛불행사로 1987년에 이어 또 한번 전 국민은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게 됐다. 이러한 전 국민의 정치적 경험 공유는 민주적인 공동체사회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제 이러한 경험으로 우리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사회적 소수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열린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한 노력들이 적극적으로 고민되고 준비되어야 할 것 같다.
/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국장

시위현장 수놓은 여성, 공론의 場에선 주변인
집회문화속 여성 … 난 이렇게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촛불시위현장에서 불리던 윤민석의 노래)

지난 3월 12일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오기의 정치로 점철된 이 날의 사태는 1987년 이후 사회각계로 돌아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의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거대한 외침을 촉발시켰다.

3월 27일까지 이어진 이 촛불시위 현장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유감 없이 보여준 준엄한 심판이었다. 국민 70% 이상이 탄핵가결 반대라는 각종 여론조사의 결과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미처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이들까지 모두가 동참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느낀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누가 누구랄 것 없이 한 목소리가 되었던 그 분노의 목소리를 가슴 뿌듯하게 기억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어깨걸이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그 정겨움과 공감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힘이고 참된 미래였다.

바로 그 촛불시위의 현장, 그곳의 절반은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형 무대를 꼼꼼히 점검하는 실무자와 자원봉사자, 공식행사를 이끌었던 진행자들 사이에 당찬 여성들의 발빠른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더욱 감동적인 것은 아이들을 두서넛씩 데리고 몇 번씩 차를 갈아타며 이 자리를 지켜주었던 수많은 아줌마부대들이다. 그들은 눈물과 함성으로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쳤다. 추위로 언 자녀들의 손과 볼을 비벼주며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몸소 체험시켰던 그들의 당당함은 말 그대로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현장과는 사뭇 다르게 여전히 각종 TV토론회와 대안마련의 현장에는 여성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전히 그것은 남성들끼리의 잔치였으며 전장이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여성들의 참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현장에서 땀흘리는 여성들의 수많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또다시 주변으로 밀려나야 하는 걸까? 왜 여성들은 위기모면용 카드가 아니면 의사결정의 주역으로 부상될 수 없는 걸까? 왜 민주주의는 여전히 공평하게 실현되지 못하는 걸까?

이제 총선이 끝나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또 한번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정치인을 선출했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국민은 실체를 가진 주권자다. 그리고 그 절반은 여성이다. 사회 곳곳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의 힘을 더 이상 주변이 아닌 중심에 공평하게 위치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촛불시위현장에서 불리던 윤민석의 노래)

지난 3월 12일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오기의 정치로 점철된 이 날의 사태는 1987년 이후 사회각계로 돌아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의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거대한 외침을 촉발시켰다.

3월 27일까지 이어진 이 촛불시위 현장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유감 없이 보여준 준엄한 심판이었다. 국민 70% 이상이 탄핵가결 반대라는 각종 여론조사의 결과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미처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이들까지 모두가 동참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느낀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누가 누구랄 것 없이 한 목소리가 되었던 그 분노의 목소리를 가슴 뿌듯하게 기억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어깨걸이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그 정겨움과 공감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힘이고 참된 미래였다.

바로 그 촛불시위의 현장, 그곳의 절반은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형 무대를 꼼꼼히 점검하는 실무자와 자원봉사자, 공식행사를 이끌었던 진행자들 사이에 당찬 여성들의 발빠른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더욱 감동적인 것은 아이들을 두서넛씩 데리고 몇 번씩 차를 갈아타며 이 자리를 지켜주었던 수많은 아줌마부대들이다. 그들은 눈물과 함성으로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쳤다. 추위로 언 자녀들의 손과 볼을 비벼주며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몸소 체험시켰던 그들의 당당함은 말 그대로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현장과는 사뭇 다르게 여전히 각종 TV토론회와 대안마련의 현장에는 여성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전히 그것은 남성들끼리의 잔치였으며 전장이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여성들의 참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현장에서 땀흘리는 여성들의 수많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또다시 주변으로 밀려나야 하는 걸까? 왜 여성들은 위기모면용 카드가 아니면 의사결정의 주역으로 부상될 수 없는 걸까? 왜 민주주의는 여전히 공평하게 실현되지 못하는 걸까?

이제 총선이 끝나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또 한번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정치인을 선출했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국민은 실체를 가진 주권자다. 그리고 그 절반은 여성이다. 사회 곳곳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의 힘을 더 이상 주변이 아닌 중심에 공평하게 위치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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