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실미도 부대, 닮은 점과 다른 점

동백꽃 따라 떠난 남도섬여행(7)- 삼별초 흔적을 찾다

등록 2004.04.08 05:39수정 2004.04.0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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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산성,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a 용장산성터, 잡초만 무성할 뿐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

용장산성터, 잡초만 무성할 뿐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 ⓒ 김정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


비록 이곳이 야은 길재가 읊조리던 개성 도읍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든 승리자가 되었든 역사는 그저 그 위치에서 담담하게 속삭일 뿐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을 간데없다"고….

a 삼별초의 꿈을 키워가던 용장산성에 몇개 남지 않은 주춧돌 만이 슬픈 패자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삼별초의 꿈을 키워가던 용장산성에 몇개 남지 않은 주춧돌 만이 슬픈 패자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 김정은

대몽항전을 위해 최후의 마지막까지 삼별초의 꿈을 키워가던 용장산성 그러나 지금은 기왓장 조각과 몇 개의 주춧돌, 빈터에 무심히 자란 잡초뿐 어느 누구도 승자의 역사보다 더 극적이어서 슬픈 패자의 역사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슬픈 역사로 남아야 하는 운명이 바로 삼별초가 지닌 태생적 한계이자 숙명 아니었을까?

고려 무인시대 군제의 문란으로 치안유지도 담당할 수 없게 되자 강화도 천도이후 당시 최고집권자인 최우에 의해 치안유지 목적으로 조정된 사병인 야별초에서부터 출발한 삼별초 그러나 이들은 정규군이 아닌 권력자의 이해득실을 위한 개인 사병이라는 한계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어차피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비운의 조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대적인 몽고 침략이 시작되었고,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들어간 무인정권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지지기반이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1256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주자 최의가 김준에게 살해됨으로써 기세등등 하던 최씨 무인정권은 몰락하였고, 새롭게 정권을 획득한 왕권파가 몽고와의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무신정권시대의 사병 삼별초는 자연히 골치 아픈 문젯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득 '김일성의 목을 따오겠다'는 자극적인 영화 속 대사를 외치며 북파공작원 양성부대로 급조된 실미도 부대가 떠오른다.

삼별초나 실미도 부대, 이 둘 다 권력자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한 때는 권력자의 맹목적이며 남다른 비호를 받는다는 점에서 얼핏 유사해 보인다.

a 얼핏 봐도 큰 규모의 용장산성,「동국 여지 승람」에는 둘레가 38,741자이고 높이가 5자로 나와있다.

얼핏 봐도 큰 규모의 용장산성,「동국 여지 승람」에는 둘레가 38,741자이고 높이가 5자로 나와있다. ⓒ 김정은

결국 원종 11년(1270) 6월,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하에 강화도 출륙대신 원종의 육촌인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대몽고 항쟁을 선언, 대몽 항전에 유리한 지역이라 판단한 이곳 진도로 향하였다.


진도에 둥지를 튼 삼별초는 이곳 용장산성에 궁전을 건립하여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춘 후 진도를 거점으로 먼저 전라도를 제압한 후 해안지대는 물론 경상도 일대까지 강력한 영향권을 행사함으로서 약 9개월간의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용장산성에서 기세 좋게 출발했던 삼별초의 결말은 매우 비극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종 12년(1271년) 여몽 연합군에 의해 용장산성이 함락되면서 당시 왕으로 추대되었던 왕온 일행은 남도석성으로 향하다 왕무덤재에 이르러 연합군의 추격을 당해 모두 참살당하고, 남도석성으로 패주한 삼별초 대장 배중손은 얼마 안 되는 부하들과 더불어 남도석성에 의지하여 분전하였으나 결국 배중손을 비롯한 부하 모두 장렬하게 전사한다.

한편, 김통정은 잔병을 이끌고 금갑포에서 제주도로 탈출하여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3년간 항거하다가 한라산에서 전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그들의 삶이 이처럼 비극적이기에, 지금 잡초와 깨진 기왓장조각만 남겨진 이 용장산성 터에서 벽파진을 굽어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풍수지리상으로 용 다섯 마리가 구슬 하나를 두고 싸우는 지형이라는 이곳에 이처럼 거대한 성을 쌓고 연호를 오랑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운 그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과연 그들이 이곳에 나라를 세운 이유는 역사에 승자가 되고자 함이었나 아니면 살아남기 위함이었을까?

치열하게 살아남고자 했으나 살아남지 못했다는 점에서 삼별초와 실미도 부대는 또 한번 닮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역사 속에서 삼별초는 살아남았지만 실미도 부대는 잊혀져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비록 정쟁의 와중에서 탄생하였지만 정권회복보다는 몽고에 대한 고려의 종속화를 막자는 명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삼별초는 실미도 부대와는 매우 다르다. 즉 항몽이라는 대의명분은 힘없는 백성들의 심정적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한 때나마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거제(巨濟)·탐라(耽羅) 등의 30여 도서(島嶼)와 전라도 일대와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海上) 왕국을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자 겉모습만 비슷한 실미도 부대와 달리 삼별초가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용장산성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미완성인 채 이곳 진도 땅에서 기왓장 조각처럼 묻혀버렸지만 그들의 꿈만은 역사 속에서 살아 지금 여기에 서있는 내 가슴 속으로 치열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묻노니, 이들의 꿈을 패배자나 반란자의 일장춘몽으로 몰아붙일 수 있겠는가?

따스한 봄빛의 햇살을 품고 삼별초의 최후를 따라가고자 용장산성 터를 떠나면서 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삼별초군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쓰러졌다고 해서, 또 비굴한 조정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역적의 반란으로 몰아붙임이 정녕 나라의 정통을 부르짖음이라 한다면, 강토는 진작 어느 오랑캐에게 짓밟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겨레는 푸줏간이나 생선 가게의 어육이 되어 얼빠진 허수아비로 됐을 것이 아닌가?"


왕온의 묘-동백꽃처럼 붉은 넋 고와라

a 왕온의 무덤, 무덤가에 핀  붉은 동백이 한맺힌 넋을 위로하고 있다.

왕온의 무덤, 무덤가에 핀 붉은 동백이 한맺힌 넋을 위로하고 있다. ⓒ 김정은

용장산으로부터 삼십리쯤 떨어진 의신면 침계리 산44번지에는 배중손이 있는 남도석성으로 합류하려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참살된 왕온의 무덤이 있다. 왕온의 못 다한 한이 서려있기 때문일까? 예부터 왕 무덤재로 불리던 이 곳은 밤이면 왕 도깨비가 나오고 낮에도 고개 밑에 있는 엉 바위에 돌멩이를 던지며 그의 넋을 달래야 무사히 지날 수가 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명색이 왕의 무덤이라 불렸기 때문인지 일제시대부터 도굴꾼이 수없이 파헤쳐 놓아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던 것을 진도군청에서 다시 복원해 놓았다.

지금 현재 왕온의 묘 주변에는 양귀비 꽃 대신 동백꽃이 붉게 피어 그의 넋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논개중


남도석성과 배중손 사당 - 옛빛은 자취를 감추고

a 담쟁이넝쿨로 둘러쌓인 남도석성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담쟁이넝쿨로 둘러쌓인 남도석성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 김정은

배중손이 최후를 맞이한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 석성은 일설에 삼별초군이 쌓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많지만, 삼국 시대에 이미 이 성을 쌓았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남도석성 앞 남도포의 앞바다는 "울돌목이 사돈을 맺자고 해도 안 맺는다"는 말이 나왔을 만큼 물살이 세기 때문에 물에 약한 몽고군과 싸우기에 이처럼 좋은 요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용장산성에서 패배한 배중손 일행은 이 곳에 모여 심기일전하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a 성 꼭대기에서 바라 본 남도석성의 모습

성 꼭대기에서 바라 본 남도석성의 모습 ⓒ 김정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는 배중손의 심정은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을 준비하기 직전인 이순신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마지막이라는 그 느낌, 둘 다 신의 도움을 갈구했겠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매정한 신은 이순신만을 구하고 배중손을 버렸다. 아니, 신의 매정함을 탓하기보다 이미 삼별초의 투쟁은 실패한 꿈으로 예정된 운명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옛빛이 자취를 감춘 남도석성 담쟁이넝쿨에 어느새 따스한 햇빛이 비친다.

크기가 비슷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남도석성 안에는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 집에 사람이 살고 있지만 조만간 유적 복원 작업을 위해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수군 만호부로 새롭게 단장된다니 과히 심기가 편하지 않다.

배중손의 최후가 어린 유적에 웬 만호부?

a 남도석성 문 앞에 줄줄이 세워진 수군만호들의 선정비,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인지, 묵시적 강요인지 의심스럽다.

남도석성 문 앞에 줄줄이 세워진 수군만호들의 선정비,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인지, 묵시적 강요인지 의심스럽다. ⓒ 김정은

배중손 사건 이후 버려져 조선 세종 때부터 이곳에 수군만호부가 주둔했다는 것은 문밖에 줄줄이 늘어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만호들의 선정비로 얼핏 짐작하긴 했지만 정체모를 선정비들이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세워진 건지, 묵시적 강요에 의해 세워진 것인지 불분명한 판에 이곳에 만호영을 복원해서 어찌하겠다는 건지….

지나가는 여행객이야 그 사연 알리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뻔지르르하게 정돈된 겉모습에 행여 삼별초 배중손의 자취가 사라질까 심히 걱정된다.

a 모양새가 특이한 쌍홍교, 뒷편의 단홍교가 더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양새가 특이한 쌍홍교, 뒷편의 단홍교가 더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정은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홍교와 단홍교 두개의 홍교가 놓여있다. 단홍교가 언제 놓였는지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쌍홍교는 해방직후에 마을 사람들이 놓았으며 두 다리 모두 편마암질의 편석을 겹쳐 세워 만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편마암 자연석재를 사용하여 만든 홍교는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드문 특이한 양식이어서 또다른 발견의 흥분을 느끼게 해준다.

단홍교를 조심조심 뛰어넘어 바로 삼별초의 마지막 유적지 배중손의 사당을 찾아갔다.

a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배중손 사당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배중손 사당 ⓒ 김정은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지만 삼별초의 최후를 마지막으로 지키지 못한 채 먼저 사망한 그의 한 때문인가? 제주도로 김통정 일행을 먼저 보내고 정작 자신은 이곳에서 최후를 맞아서인지 배중손 사당 앞에는 그의 넋이나마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패자는 말이 없지만 패자의 기상은 역사와 현실 속에서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다. 묻노니, 역사 앞에서 정정당당한 패자가 될 것인가? 비굴한 승자가 될 것인가?

사연이 많은 만큼 생각도 많은 진도여행, 어느덧 자동차는 이 여행의 종착지인 운림산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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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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