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람들이 차별 받는다고?

라트비아 시민권 시험과 러시아인의 반발, 그 진실

등록 2004.04.12 09:51수정 2004.04.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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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발트3국을 약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라트비아는 아주 나쁜 나라다, 그래서 국제적인 제재가 필요하다’며, 어딘가에서 퍼온 듯한 기사를 인용해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ㅈ일보사에서 나온 것이었고,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발트3국을 집중적으로 다룬 특별기사였다.

라트비아가 무슨 테러국가도 아니므로 특별히 나쁜 나라라는 인상을 줄만한 이유도 없거니와 메일을 보낸 이가 말한 것처럼 국제적인 제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상당히 의아해했었는데, 첨부된 기사는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물론 그 기사를 많은 사람들이 접한 것은 아닐테고, 그리고 접한다 하더라고 충분히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쪽 귀로 흘리는 일이 대다수겠지만,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라트비아 애호가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고, 그리고 라트비아인들이 지금까지 어렵게 일구어온 역사적, 정치적 업적들이 무시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었다.

문제는, 그 기사에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아는 대로, 라트비아는 구 소련 시대 전 공화국 중 산업화가 가장 진전되고, 그리고 생활환경이 가장 좋았던 곳 중의 하나로서 러시아의 고위급 계층과 전문인력이 많이 이주해왔다.

그 결과 라트비아 전체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수도 리가의 거주인구 60%가 러시아 이주자들이어서 정작 라트비아인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리가에서 뿐 아니라 라트비아 기타 주요 도시의 상황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고, 특히 동쪽 지방인 라트갈레의 경우 그 심각성은 아주 높다. 독립 후 러시아 사람들에게 라트비아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해서 라트비아어 시험과 역사시험을 필수로 치르게 했는데,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시민권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ㅈ일보 기자는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단어에는 ‘네가 준 고통 그대로 다시 갚아주자’는 식의 복수성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수백 년간 독일의 동쪽영토였던 리보니아의 일부로 존재하던 라트비아가 소련의 영토로 들어간 것이 2차 대전 이후이므로 그 후에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평생 러시아어만 사용한 사람들에겐 비교적 가혹한 정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정작 누구이며, 국제사회의 제재가 필요한 당사자는 누구인지 정말 깊게 생각을 해봐야한다.


그 기자가 자료를 수집하면서 사용한 언어가 러시아어라고 한다면 러시아인의 입장에서 증오심과 반감이 가득 녹아든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라트비아어처럼 인지도가 낮은 국가의 기사가 보도되는 경우 주변 강국의 시각에서가 아닌 그 나라의 고유한 시각으로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에겐 아직도 힘든 일일까.

1941년은 2차 대전 기간 중 스탈린 정부에 의한 강제이주가 시작한 해이며,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1만5천여명이 하루아침에 낯선 곳으로 이주를 해야했다. 지금처럼 개발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시베리아에서 추위와 고통 속에서 싸우다 조국에 차마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객사한 사람들이 수천명이고,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1949년 3월에도 하루에만 4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시 시베리아로 내몰려지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라트비아 현지인 중 주변이나 친척, 가족 중에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기억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새벽에 난데없이 잠에서 깨어 어딘가 모르게 끌려가, 고통 속에 살다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도 라트비아 사람들은 정작 슬퍼하는 내색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강제 이주나 소련의 지배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13만명이 넘는 인구가 라트비아를 떠나 인구가 3분의 1로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라트비아에 대규모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그 빈자리를 구 소련 고위급 관리와 전문직 인력들이 메우게 되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라트비아에 해놓은 일들은 특별히 지면을 빌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상상이 될 듯싶다. 라트비아인들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기 위해 라트비아어 사용도 제한되고, 소비에트적 이상형을 교육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의사의 표현 역시 극히 제한되었다.

그런 억압의 세월 속에서 자유를 찾아 독립을 했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라트비아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러시아인들 역시 많아서 마땅히 돌아갈 곳이 러시아밖에 없던 사람들 역시 많지만, 엄연히 그곳은 러시아가 아닌 라트비아인들이 주인이 된 땅이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 우리나라가 해방된 후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서울의 인구 60% 이상을 차지하며 일본말만 사용하면서 산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모든 언론매체들은 러시아 사람들도 정보를 얻는 기회가 동등하게 부여되도록 러시아어판을 항상 동시발행하고 있으며, 텔레비전에서도 절반 이상의 프로그램이 러시아어와 병행하여 방송이 된다(심지어 주말 저녁에 러시아 지역 소식을 전해주는 뉴스를 시청한 기억도 있다. 말하자면 라트비아에서 러시아 '6시 내 고향'이 방영된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에 가도 러시아어를 기본적으로 자막에 넣어주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어를 필수로 넣어야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도 러시아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고, 러시아어만을 사용해서도 아무런 지장 없이 일상생활을 해나갈 수 있어, 그곳에 가면 정작 러시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시민권 취득을 위해서 라트비아어를 공부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게다가 91년 독립 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시험 없이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 중에서 라트비아어를 공부하여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고, (현재 유럽연합 가입을 목전에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있긴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리가 시내에서 라트비아어 구사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불법이민자들이므로 취업과 공공업무의 혜택에서 제한되는 불이익을 당해야했으며, 현재까지도 시민권이 없는 러시아인들이 상당비율에 이른다.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도 라트비아를 독립국으로 느끼는 분위기가 저조해, 라트비아가 조만간 러시아의 영향권 내로 다시 편입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정작 라트비아를 아직도 러시아의 일부로 여기고 있던 셈이다(발트3국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직까지도 충분히 가능하다).

라트비아는 다른 독립연합국가들과는 전혀 달리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를 절연하고, 서유럽과 북유럽을 향한 길로 나서고 있었다. 러시아는 라트비아의 시민권을 따기 위해 치러야 하는 라트비아어와 역사시험이 러시아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라트비아를 공공연히 국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고, 경제제재 조치까지 취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라트비아의 교육제도가 러시아의 소수민족까지 포용하는 아주 효과적인 정책이라며 입을 모이고 있던 참이었다.

작년 라트비아의 유럽연합 가입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러시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의 선거 참여율은 극히 저조했고, 그나마 대다수가 라트비아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반면 러시아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시에는 투표소에 길게 줄을 서 투표에 참여하는 열성을 보여주어 많은 대조를 보였다.

게다가 라트비아 내 모든 학교에서 전체 과목의 60% 이상을 필수적으로 라트비아어로 실시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되자, 라트비아에 사는 러시아계는 물론이거니와 크렘린에서까지 러시아 소수민족의 탄압이라며 상당히 언짢은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또 각종 국제회의에서 체첸과 같은 러시아 소수민족의 인권문제가 거론 될 때마다 러시아 정부는 라트비아 내에 존재하는 러시아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이 해결되지 않으면 거론조차 하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럽연합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5월 1일에 맞추어 라트비아 내 러시아 소수민족의 문제를 전세계로 공론화 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과격단체에서는 러시아어 교육시간의 감축에 항의하여 테러를 자행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고 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의 사용범위는 과히 국제적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라트비아가 그들을 위해서 더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트비아어 습득에 관한 불만을 가지고 시민권 시험을 거부하는 러시아인들로 인해서 현재 전체인구 중 25.69%가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자로 남아있다. 이렇게 시민권 관련한 사안이 유럽연합 가입을 앞두고 있는 라트비아의 큰 장애물이 되었으며, 부패 등의 사회문제와 더불어 아직까지도 껄끄러운 사안으로 남아있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라트비아 정부는 러시아인들이 그 땅에서 같이 살아나가야 할 이웃으로서 서로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주는 정책을 실현해 나갔으며 라트비아의 언어를 습득해 시민권을 습득하는 것은 자신이 살게 되는 새로운 조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보아야 한다.

더이상의 양보라 한다면, 러시아 사람들이 과거 소련 시절의 혜택을 그대로 누리면서 러시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것밖엔 없다. 아직 많은 러시아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땅이 소련이 아니라, ‘라트비아’라는 이름의 새 나라라는 것을 새로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약 105만명이 사용하고 있는 라트비아어는, 세계에서 가장 적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 중 하나로 인구 감소와 러시아어와의 경쟁 등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자칫하다간 사어가 될 수 있는 위험에 처했다.

꿈에 그리던 나토에 가입해 세계 만방에 러시아와의 절연을 공표한 라트비아는, 세계가 모르는 여러 문제들을 안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주변 강대국의 공세로 인한 부당한 역차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유럽연합 이후 많은 발전을 거두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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