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자존심, 진짜 양심을 챙겨야지요"

총선의 추억 ④ 생각 없는 사람들

등록 2004.04.14 07:42수정 2004.04.1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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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생각 없는' 사람들과 별의별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도 만나고 겪었지만, 요즘 같은 총선 국면에서는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1981년 고장에서 '흙빛문학회'를 창립하고 83년 종합문예지 <흙빛문학>을 창간했다. 86년부터는 일년에 두 번씩 발간해서 현재 40호 발간을 기록하고 있다. '흙빛'이라는 이름은 흙과 관련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내가 창안한 이름이다.

참으로 어렵게 책을 만들던 초창기 시절, 한번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교사들과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잠시 흙빛문학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는데, 교사들은 자꾸 '흙빛'을 '흑빛'이라고 발음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한 분이 "그 '흑빛'이라는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불온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놀랍게도 동료 교사들이 모두 동의를 했다.

'흙빛'의 '흙'을 자꾸만 '흑(黑)'으로 느끼고 인식하는 까닭일 터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그 이름에서 '불온한' 느낌을 받는 것일까? 나는 일말의 충격 속에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 이데올로기의 유습에서 영향 받은 탓이 아닐까 하는 모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 그 교사들 중 한 사람은 내게 <흙빛문학> 증정본을 돌려보내면서 자신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주라는 말을 했다. 그 분은 현재 교장이 되어 있다.

또 한 사람은 책을 받기만 하고 한 번도 읽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눈치를 채고 아예 내 쪽에서 책을 보내지 않게 되었는데, 그와 그의 아내는 영화광인 듯했다. 내 누이동생이 운영하는 비디오 가게에 매일같이 들러서 하루에 하나 꼴로 비디오를 빌려간다고 했다. 그때는 '전교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이어서 한번은 내 매제가 그에게 "도대체 전교조가 뭐고,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뭐냐?"고 물었단다.


의외로 그 사람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단다.
"응, 별 거 아녀. 월급 많이 올려달라는 거여."
그 얘기를 내게 전해주며 매제는 그 친구를 경멸했다.

그 후 그는 교감이 되었는데, 동료 교사들에게 너무 많은 '보증 빚'을 안겨 준 것이 문제가 되어 사직을 하고 급기야는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몸을 감추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2)

6공 시절, 국회의 이른바 '광주사태청문회'로 말미암아 광주에 관한 얘기들이 어디서나 사람들 사이에 쉽게 화제가 되던 때였다.

한번은 친척 형님 한 분과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분은 6·25 전쟁 경험 세대로서 술만 한잔 들어갔다 하면 꼭 6·25 시절 얘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그 날은 그 분의 6·25 얘기가 나오기 전에 광주 얘기가 먼저 나왔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내 입에서 2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 수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그 분이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말헐 것 읎어. 육이오 때는 더 많이 죽었어."

그 순간 나는 어처구니없는 충격 속에서도 다시는 이 양반과 술자리를 함께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소변을 보러 간 사이에 혼자 그 술집을 나와버렸다.

그 후 90년대 중반 우리 충청도 지방에도 이른바 '신지역감정' 바람이 거세던 시절 그 분은 용하게도 그 바람을 타지 않았다. 제15대 총선 때는 모 정당 후보를 도와 선거운동을 했다.

하루는 내가 그 분께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형님은 지조가 있으신 분이네요. 지역감정 바람에 휩쓸리는 것보다야 그게 백 번 났지요."

그 분은 내게 고마워했다. 별스럽지는 않아도 작가 명색을 걸치고 사는 친척 동생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해준 것이 정말 고마웠나 보다. 그래도 자신은 지역감정 바람에 가볍게 휩쓸리지 않는 최소한의 지조는 지니고 산다는 말을 어디에서나 곧잘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도 고마운 사실은 그분이 최근 내게 보여준 변화된 모습이었다. 그 분이 최근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이 궁금했는데, 그는 대통령을 탄핵한 야당 의원들을 일컬어 '대낮노상강도'라는 격한 표현을 쓰면서 몹시 분개했다.

나는 되레 의아한 마음이었다. 그분의 그런 의외의 태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내 나름대로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니, 그분의 외아들과 며느리 덕이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지난해 결혼한 아들 내외와 많은 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 긴밀한 대화가 수시로 오고감으로써, 그분이 얼마 전에는 오랫동안 보아오던 <동아일보>를 끊은 사실도 나는 알게 되었다.

(3)

1989년 7월 대학생 임수경씨의 입북 사건으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이 시끄럽던 때였다. 하루는 외출을 했다가 오후 햇살을 피해 누이동생의 비디오 가게로 들어가서 땀을 식히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때 텔레비전은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대학생 임수경씨가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한 사건과 관련한 보도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맵시 있게 생긴 한 젊은 여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비디오 테이프들을 살피기 전에 우선 텔레비전 쪽으로 눈을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런 말을 했다.

"미친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년이 뭘 안다고 저런 지랄을 다하고! 내 기가 막혀서 말도 잘 안 나오네!"

말이 잘 안 나오기는…. 나는 그런 느낌을 삼키다가 잠시 후 그녀에게 물었다.
"임수경이를 욕하는 근본 이유가 대체 뭐요?"

나는 그녀에게 근거가 확실한 논리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요구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답변은 너무도 의외였다.

"저 년 때문에 내가 증권을 밑졌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덕분에 그녀의 얼굴을 내 뇌리에 새길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를 각종 선거 때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때마다 그녀는 어깨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당이 매번 일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선거 때마다 정당을 바꾸어 선거운동을 하는 그녀에게 한가지 모호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그녀가 몸을 담고 선거운동을 한다면 더욱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그녀의 그 변신에 어떤 확실한 이유가 있는지, 그녀의 '생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4)

10여 전부터 천안에 자주 간다. 지난 해부터는 천안으로 고교 진학을 한 딸아이 때문에 더 자주 가게 되었지만, 오래 전부터 천안과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천안에 자리잡고 있는 예술단체 지회의 기관지 편집위원 노릇을 하고 있는 탓이다.

지난 1996년 제15대 총선 직후 또 한번 편집회의 일로 천안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예술단체 지회의 수장은 현직 교사(지금은 교감)에다가 미술작가인 분이었다. 편집회의 전에 자연스럽게 총선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누구를 찍었느냐는 한 편집위원의 질문에 그 수장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우리 충청도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찍었지요, 뭐."

대학교수인 편집위원 한 분은 잘했다고, 자신도 그랬다고 했고, 고교 교사인 편집위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나는 꾹 참았다가 편집회의 후 저녁식사까지 마친 다음 헤어질 때 그 수장에게 말했다.

"아까 자존심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진정한 자존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존심이라는 말 함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나는 문인이고 당신은 미술인입니다. 우리 같은 예술 작가들에게는 자존심이 생명 같은 것입니다. 가짜 자존심이 진짜 자존심을 능멸하고, 가짜 양심이 진짜 양심을 까뭉개고, 가짜 중심이 진짜 중심을 짓밟는 상황은 앞으로도 더욱 심화될 겁니다. 그럴수록 우리 같은 문화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짜 문화인들, 가짜 국민들이 많아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의 그 말을 그때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로도 여러 번 그를 만났지만, 그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가급적 정치 관련 얘기는(그게 꼭 정치 얘기인 것만은 아닌데도) 서로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 작용한 탓이기도 했다.

오늘(14일)도 나는 오후에 천안에 간다. 그 잡지의 편집회의 때문이지만 딸아이도 볼 겸 먼길을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그 수장에게 1996년의 그 왜곡된 충청도 자존심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생각이다. 말이 나오면 지난 2000년의 총선과 2002년의 대선 때는 그의 태도가 어땠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7대 총선 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왠지 절박해지는 심정이다. 더욱 절절히 하늘에 의지하고픈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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