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연극 속의 노년(9) - 〈배우 백성희 자전극 '길'〉

등록 2004.04.15 13:29수정 2004.04.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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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인생에서 4분의 3에 해당하는 60년 동안 오로지 한 가지만 바라보고 그 일만 해온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그런 외길 인생은 또 얼마나 큰 용기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일까.

극장 안은 한 여자가 연극을 통해 한 사람의 큰 배우로 만들어져 가는 〈길〉을 눈으로 보고 또 잠시라도 그 길을 함께 걸어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화 예술계의 얼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하얀 머리를 쪽진 원로 배우 황정순씨가 들어서자 객석에서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반가운 환영의 박수가 터지기도 했다.

1925년 생. 올 해 일흔 아홉. 막이 오르자 작은 체구의 노배우는 더할 수 없는 흡인력으로 큰 무대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외삼촌이 가져온 일본 공연 팸플릿 속 배우들 사진에 빠져들어 배우의 꿈을 키우며, 유성기에서 나오던 판소리를 줄줄 외워대던 어린 시절. 여학교시절 들어간 '빅타무용연구소'에서의 노래와 춤 연습. 그리고 시작된 무대 위의 인생.

백성희의 독백으로 혹은 의자에 나란히 앉은 젊은 여배우와의 대화로 그 긴긴 역사가 하나씩 펼쳐지는데, 그것은 한 배우의 일생이기도 하지만 배우가 써 내려가는 우리나라의 연극사이기도 하다.

고이 기른 딸이 '광대'가 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온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선비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몽둥이까지 손에 드셨다고 했다. 그 험한 길로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결국 딸을 이기지 못하셨다.

홀로 선 무대에서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았노라며, "아버지 저 연극만 하며 살았습니다!" 고백하는 팔십 노배우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고 목이 메인다. 이 한 마디로 아버지 가슴에 박힌 못은 다 녹았으리라. 배우의 눈물은 절제를 알지만 객석의 나는 그럴 줄 몰라 겉으로는 배우보다 조금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1940년대 말, 그 살기 어려웠던 때 연극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무대 위의 세상에서 현실의 고단함과 남루함을 던져 버리고 꿈을 꾸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무대 위 스크린에는 우리 연극사의 기둥을 세운 연극인들의 흑백 사진이 떠있고 그 아래 무대에서는 그들과 한 시대를 살았던 배우가 그들을 기억하며 그리워하며 또 다른 세상을 그려나간다.

연극은 백성희의 연극 인생을 이야기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백성희의 대표작인 〈메디아〉, 〈뇌우〉, 〈달집〉, 〈베니스의 상인〉, 〈갈매기〉의 장면들이 극중극(劇中劇) 형식으로 사이사이 들어가 있어 인물과 시대를 넘나들며 잠시라도 연극에 푹 빠져드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만들어준다.

처음에는 꼭 할머니가 들려주는, 할머니가 주인공인 옛날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사적(私的) 회고담에 빠지지 않은 것은 연극을 하는 자의 열정과 끼, 그로 인한 고통과 몸부림,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그 절대 고독과 절대 긴장의 순간들이 그의 말과 연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오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배우 아닌 무대 밖 일상에서 한 여자로 살아온 삶도 솔직히 보여준다. 사랑했던 남편, 남편의 외도로 인한 헤어짐, 끝내 용서할 수 없었던 세상 떠난 남편에 대한 회한. 설득하고 매달리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후회는 가슴 아픈 고백이 되어 가슴에 스며든다.

큰 무대 한 가운데 외롭게 서서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며 자기 아픔을 고백할 때, 그 모습은 어찌나 순정한지 오히려 눈부시다. 눈물 흘리는 선배를 안아주는 후배의 어깨는 어쩜 그리도 든든한지, 인생의 선후배로 서로에게 존재하는 우리들의 실체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어찌 같이 울지 않을 수 있었으랴.

"나는 이 길을 왔어
다른 어떤 길도 아닌 배우의 길을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이 길을
죽을 때까지 가는 거야
그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평생 모르는 채 말이야."
백성희의 이 대사에 그의 인생이 들어있다.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연극이 끝난 후 우리 모두는 기립박수로 평생 무대를 지켜온 배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 아름다운 노년의 배우를 가진 것이 너무도 행복했기에.

같이 무대에 섰던 후배 배우들과 손을 잡고 서로 어깨를 두르고 무대 뒤편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그저 박수를 치고 또 쳤을 뿐이다.

존재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인생인가.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처음에는 그 어디에도 길은 없었으리. 그러나 걷다보면 길이 되는 법, 그 길을 만들며 걸어왔고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노년은 그래서 참으로 소중하며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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