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32

애향이

등록 2004.04.16 17:45수정 2004.04.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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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위길은 김언로를 따라 다니며 어떻게 별감 강석배와 접촉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놈이 그냥 별감이 아니라 동궁전의 신임을 받는 별감이니 주의하고 또 주의를 다해야 하네. 보아하니 기방에 자주 드나드는 모양으로 기방만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놈을 만날 수 있을 걸세."


백위길은 포장 박춘호와 김언로가 왜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이 사대문 안을 나다닌다고 해도 굳이 우포도청의 포장이 책임을 질 일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언로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그런 말이 백위길로서는 선뜻 나오질 않았고 둘러서 거부의 뜻을 은근히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방 근처에서 기웃거리면 남의 이목이 염려됩니다. 차라리 이 일을 포도대장께 아뢰고……."

"이 사람이! 그런 것까지 아뢰면 면박이나 받지!"

김언로는 전에 없이 엄한 표정을 지었고 백위길은 잠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김언로를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기방에 다 와서야 백위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별감을 우리가 무슨 명목으로 잡는다는 것이오?"


"그 놈의 뒤를 밟을 걸세. 그럼 뭔가 꼬리를 밟을 수 있겠지."

그 날 이후로 백위길과 김언로는 퇴청 후에는 기방으로 와 강석배가 드나들었나를 살폈다. 백위길로서는 왠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김언로의 열성적인 태도를 보며 이런 지루한 일일지라도 포교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엿새째, 강석배는 기방에 얼굴조차 들이밀지 않았다.


"허! 이거 강별감이 자네더러 입막음이라도 하라고 시킨 거 아닌가?"

이젠 기다리다 못해 아예 기방에 들어서서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며 의심하는 듯한 김언로의 말에 행수기생 윤옥이 무슨 소리냐는 듯 펄쩍 뛰었다.

"말이 지나치십니다! 기방에 지체 높으신 양반 내들도 오는데 별감의 말에 우리가 고분고분 따를 것 같사옵니까? 게다가 포교들께서 찾는 다면 필시 복잡한 곡절이 있을 것인데 어찌 저희가 눈치 없이 거짓을 아뢰겠사옵니까?"

거침없이 줄줄 흐르는 윤옥의 말에 김언로는 질렸다는 듯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려다 백위길을 툭 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놈이 눈치를 챘는지 몸조심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하고 오랜만에 기방에서 술이나 마시는 게 어떻나? 보아하니 오늘은 조용하구먼."

백위길로서도 반복되는 일과에 지겨움을 느낀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구석진 방으로 자리를 잡은 김언로와 백위길에게 애향이와 또 하나의 기생이 술상을 들여왔다. 애향이는 백위길을 보자마자 얼굴에 환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옆자리에 앉았다. 김언로는 의외라는 듯 애향에게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애향이는 항상 찡그린 표정이더니 백포교만 보면 교태로와지네."

"예?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전에도 그랬사옵니까?"

김언로의 말에 애향이는 입에 손을 가져다대며 웃음을 참았다. 백위길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바로 예전에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웃으며 술을 따르던 기생이 애향이었다. 애향이는 백위길의 술잔에 넘질 듯 말 듯 술잔을 따르며 느긋한 목소리로 즉석에서 시조를 읊듯 말했다.

"기방에 오는 이는 어찌 그리 거만한지. 사서삼경 읊어대는 양반내야 당연지사. 궁중 전 보전하는 별감님들 홍포 바람 나랏님 귀 승정원의 사령위세 대단하지. 포도청의 포도군관 그 위세도 까다롭다. 지금 보는 군관님은 위세 따윈 간데 없고. 숫기 없는 남정내의 향내만 그윽하여라."

"푸하하하… 애향이가 아주 자네가 맘에 쏙 들었나 보이!"

백위길은 애향의 노골적인 추파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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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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