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감기가 걸리면 문을 두드리세요"

[인터뷰] 밝은미술치료 작업실의 박승숙 미술치료사

등록 2004.04.17 12:49수정 2004.04.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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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밝은미술치료작업실 내부

밝은미술치료작업실 내부 ⓒ 송민성

밖에서 보면 아담해 보이지만 밝은미술치료 작업실은 꽤 넓었다. 담배를 피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을 기다릴 수 있는 대기실도, 의외로 넓은 작업실도 외장과 마찬가지로 온통 하얀색이다. 병원을 연상시키도록 지나치게 깨끗하고 갑갑한 흰색은 아니다. 오히려 적당히 손때가 묻어 편한 느낌이다. 하얀 벽면 여기저기 매달고 붙인 작품들이 갑갑함을 한결 덜어준다.

책장과 미술도구, 작품진열대가 각각 한 면씩을 차지하고, 나머지 한 면에는 내담자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걸려있다. 무얼 그렸는지 분명치 않지만 내담자들 나름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다.

작업실을 운영하는 박승숙 미술치료사를 찾아간 것은 14일 이른 아침이었다. 작업실의 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여행을 하게 됩니다. 가장 짧지만 가장 힘겹게 걸어가게 되는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15인치,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말하자면 미술치료사란 그 15인치의 여행을 돕는 가이드인 셈이다.

미술 치료는 카타르시스이고 대화

“상담이에요. 보통의 상담이 논리적 언어, 즉 말을 통해 감정을 느끼거나 해소한다면 미술치료는 시각언어라는 요소가 추가되는 게 차이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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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미술치료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박 치료사는 명쾌하게 답을 한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상담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는 논리적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생긴다. 이 때 감정 전달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 미술작업이다. 무언가를 그리다 보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리든 그렇지않든 무의식이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작업을 자신과의 대화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몰입해 진짜 자기와 접촉하게 되는 경험이 의외로 드물어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일상에서 잊고 있는 자기와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거에요. 정작 그릴 때는 뭘 그리는지 몰라요. 완성한 다음 객관적 거리를 두고 하나하나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느낌들이 살아나죠. 작업 자체가 카타르시스이고 대화인 셈이죠.”


“매일매일 경이로움 속에 살아요”

박 치료사의 미술치료는 보통 11개월~1년 정도의 시간을 잡는다. 당연히 개인차가 있어 짧게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장해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그룹은 전자우편으로 모집한다. 각 구성원들이 안고 있는 문제나 그들의 성격에 따라 그룹을 구분하진 않으므로 만남은 ‘전적으로 인연’에 좌우된다. 특별한 사정이 아니라면 주로 그룹상담을 한다.

“그룹상담이 훨씬 피곤해요.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이 많다보니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도 어렵구요. 그런데도 그룹상담을 하는 것은 사람의 힘을 믿기 때문이에요. 뭉쳐있을 때 나오는 특유의 힘이 있어요.”

구성원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작업하면서 서로 치유해 가는 과정을 박 치료사는‘경이로움’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한다.

“누구나 치유력과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그저 약간의 힘을 더해주는 것 뿐이죠. 뭐가 얼마나 필요한지 공식화할 수는 없어요. 어떤 이에게는 냉정한 현실직시가, 또 다른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거든요.”

치유력과 힘의 싹을 틔워주기 위해 박 치료사 역시 한 구성원으로서 그룹에 스며들어가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철저히 분석하고 가능한 모든 상황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치료사의 역할이다.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뿌듯하고 기쁘고. 사람이 이렇게 놀라운 잠재력을 가질 수 있구나 신기해하고. 그 덕에 매일매일 경이로움 속에 살죠.”

미술치료를 시작하다

그의 명쾌한 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박 치료사가 공부를 시작하던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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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예술학과에 진학했어요. 미술비평 등을 들으며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공허하더라구요. 뭐하자는 건가 싶고. 그때 우연히 미술심리학을 알게되었고 휴식과 공부를 겸해 떠난 미국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어요. 결국 처음 마음먹었던 걸 하게된 셈이죠.”

공부를 마치고 4년만에 돌아와보니 정신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엔 잘 먹고 잘 살면 끝. 건강하면 그저 신체적 건강만 떠올렸거든요. 많이 바뀌었죠. 조울증이나 우울증이 상식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니까.”

마침 함께 공부했던 동기들이 비슷비슷한 시기에 돌아와 활동하면서 미술치료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학원과 문화센터에서 우후죽순처럼 미술치료과정이 생겨났다.

미술치료의 확산, 그러나…

미술치료가 알려지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로서는 기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부분도 적지않다.
“문제는 미술치료를 받으려는 사람보다 치료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거죠. 미술공부나 심리치료 하던 사람에게는 일종의 새로운 직업으로 각광을 받는 건데 막상 졸업해도 미술치료사로 일할 곳을 찾기가 힘들어요. 자원봉사자들도 많구요. 수요는 적은데 공급은 많은 셈이죠.”

또 치료사는 현재로서는 합법적인 직업이 아니다. 현재의 정신보건법은 의사만 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은 비단 치료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쉽게 치료사를 찾아가 상담을 할 수 있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병원 밖에 없다. 정신병원에 대한 거부감으로 치료를 꺼리다 문제를 키우는 사람들도 많다.

“개정을 통해서 공식 직업군으로 인정을 받아야겠죠. 감기 걸리면 병원 찾아가듯이 마음이 아프면 상담소를 찾아가는 게 당연할 수 있으려면. 물론 시간이 적잖게 걸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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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남을 ‘치료해주는’ 오만한 전문가는 No!

단기간에 획일적으로 미술치료사를 양성해내는 교육과정도 아쉽다.

“2년 동안 공부하고 논문 쓰다 보면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해요.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니까 약점을 드러내기도 쉽지 않고. 모든 게 학점과 관련되다 보니 세상과 삶에 대한 눈을 틔우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그런 상황에선 치료사적 마인드를 갖추기가 힘들죠. 좋은 치료사가 되려면 자기부터 치유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치료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는’ 거라고 착각하죠.”

문예아카데미에서 미술치료 강의를 시작한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문예아카데미에서는 치료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치료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과 삶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둔다. 평가나 경쟁은 당연히 없다.

“한 절반 정도는 내가 기대하는 치료사적 마인드를 갖추고 졸업하는 것 같아요. 자격증을 주는 것도 아니라서 다른 교육과정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유학을 떠나든 대학원을 가든 그 다음은 알아서 하는 거죠. 그래도 잘 할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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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마음의 감기가 걸리면 문을 두드리세요

4월 초부터 인사동에서 시작한 로드미술치료는 그 학생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미술치료에 대해 알리기도 하구요. 물론 한 번 가지고는 치료의 효과가 없지만 미술이 자신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어요. 흔히 미술치료가 손금보듯 척 보면 아는 것이라는 오해도 씻을 겸해서요.”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두 번째 작업부터는 양보다는 질을 위해 예약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러한 커리큘럼을 갖춘 문예아카데미 과정을 잘 키워나가는 것이 박 치료사의 현재 목표다.
“이제까지도 목표를 쫓아온 게 아니니까요. 꿈을 꾸면서 흘러가다보면 어딘가에 닿아 있더라구요. 어떤 쪽으로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요. 아등바등 살 필요, 없는 것같아요. 실현될 것은 실현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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