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탕 안의 꽁치튀김

어느 장애인 가정의 낯선 음식과 익숙해지기

등록 2004.04.19 01:25수정 2004.04.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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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애인 부모를 둔 현정이와 지현이의 집에 과외봉사를 나간 지 이제 10여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마침 현정이네 집이 있는 임대아파트 가까이에 숙부님이 운영하는 횟집이 있어서, 언제인가 현정이 어머니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숙부가게에서 회를 받아다 드리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거절했다. 그 이유를 좀더 알아보니 회를 먹은 경험이 없고, 회는 날 것이라서 왠지 조바심 난다는 것이었다. 회를 접해볼 기회가 없는 집이 있고 어려운 살림살이가 식사 기호까지 제약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왔다.

물론 본디부터 회 같은 날 음식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이네 넉넉치 않은 형편을 미루어 보건대 이는 낯설음이 가져온 경계심일 것이다. 결국 회를 애써 권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회보다는 저렴한 매운탕 거리를 가져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오늘(18일)이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었다. 숙부 댁에 들러 매운탕 거리 두 주발과 꽁치 튀김을 각각 별도 봉투에 담아 현정이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매운탕 끓이는 것이 처음인지 30대 후반의 현정이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이것을 조리할 수 있냐고 이래저래 물어왔다. 나는 그저 "냄비에 그냥 그것 통째로 넣으시면 될 겁니다"하고 답했다.

2시간 반 여 동안 현정이와 지현이의 공부를 살피고 나서 조촐한 반찬이 정갈하게 깔린 조그마한 교자상을 두고 식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나는 매운탕과 꽁치 튀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현정이와 지현이 그리고 애들 아버지와 내가 둘러앉은 상 한가운데 냄비가 올라왔다. 나는 아까 가져온 꽁치를 떠올리고는 '튀긴 꽁치는 그새 식었겠구나. 그래도 뭐 그쯤이야'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이 어머니가 "생선이 참 푸짐하네요"하며 냄비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난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알맞게 소금이 가미되어 프라이팬에 튀겨온 꽁치가 매운탕 냄비 안 한 가운데에 '떡'하니 잠겨 있는 것 아닌가.


시각장애인인 현정 아버님은 "어, 참 오랜만인데. 생선찌개 냄새가 참 좋구만"하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혼자 곰곰히 꽁치 튀김이 매운탕 안에 들어간 곡절을 추측했다.

일단 이 두 내외는 생선류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시각장애인인 애들 아버지를 고려할 때 뼈를 발라내면서 수월치 않게 먹는 음식은 자연히 꺼리게 될 것이다. 아버지 외에 어머니도 정신지체가 있고 집안 형편도 어려우니 횟집은 외식장소가 되기 어려우리라. 그 곳의 단골메뉴인 꽁치튀김도 당연히 낯선 음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매운탕이나 꽁치튀김 자체가 모두 익숙치 않은 음식이므로 이런 잡탕찌개가 나오게 되지 않았을까?


이런 추측에 확신을 더하게 된 것은 내외가 이 매운탕을 계속 생선찌개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차마 이런 내 추측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왜 이런 방식으로 요리하였냐'고 묻기에는 이미 나를 제외한 식구 4명이 한창 맛있게 그들의 '찌개'를 먹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현정 어머니가 "선생님, 찌개 드세요"하고 권한다. "아, 예. 어머니. 찌개 냄새가 정말 좋군요. 맛있겠는 걸요"하고 답하고서 잽싸게 수저를 옮겼다.

몇 달 전 이곳에서 저녁 대접을 처음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바삐 수저를 옮기면서 약간 채한 기운을 느낄 정도로 맛나게 먹었다. '그래, 맛있다고 생각하면서 먹자'라는 생각으로 먹긴 먹었지만, 그러면서도 여기 있는 정이와 현이도 매운탕 거리 안에 꽁치가 담긴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으로 애처로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뭔들 어떠랴. 우리가 꽁치 튀김과 매운탕을 나누어 먹는 것도 어떤 일정한 습성의 산물에 불과할 뿐 그것이 결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어쨌든 어떠한 형태로든 9살과 10살의 두 소녀가 매운탕을 맛보도록 조금이나마 기여한 데 만족한다. 아이들만큼은 그들의 부모와 달리 어린 시절에 생선을 접할 수 있게 해준 밝은 눈이 있다는 사실을 축복하면서.

다만 부모와 함께 한 저녁 상 앞에서는 말해 줄 수 없었지만, 다음 주 일요일 과외봉사시간이 되면 두 소녀에게 따로 말해주리라.

"얘들아. 지난 주에 먹은 생선찌개말이야. 그거 '매운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대개 사람들은 꽁치를 따로 떼어놓고 먹는단다. 하지만 엄마가 해주신 찌개 참 맛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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