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패자를 잊지만 전설은 흔적을 남기고...

산 따라 전설 따라 바다로 간 청송, 울진여행(1) 주왕산 대전사

등록 2004.04.20 06:47수정 2004.04.20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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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먼지 나는 헌책방에 쌓여있는 책 가운데서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헌책방 대신 자동차로 떠난 여행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물같은 사연과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어 즐겁다.

산이 자신의 그림자로
짐승들을 울리고
강은 깊은 흐느낌으로 조개들의 전설을 만든다.
낡은 서점의 잊혀진 책 속에서
자신의 신화를 캐내는
뼈아픈 민족의 그림자와
손잡고 걸을 수 있는
내 핏줄의 단군 할아버지
(중략)

산 위에서 보며 살자
욕심으로 멀어진 거리
좀더 높은 데서 멀리 보며
밝게 웃을 수 있는 전설을 남겨 주자
아득한 우리의 후손
그들만은 싸우지 않는.
서정윤/ 어떤 우울한 날에 중



어느새 자동차는 서안동 인터체인지를 나와 안동 시내를 가로질러 34번 국도를 따라 청송으로 가는 중이다. 청송은 중앙고속도로의 완전 개통으로 예전보다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오지다. 그래서일까? 왠지 여행객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전설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청송 가는 길- 복사꽃과 청송교도소

a 36번 국도 주변에 얼핏얼핏 보이는 복사꽃, 처음에는 복사꽃이 아닌 줄 알았다.

36번 국도 주변에 얼핏얼핏 보이는 복사꽃, 처음에는 복사꽃이 아닌 줄 알았다. ⓒ 김정은

영덕 방면으로 계속 달리다보니, 도로 양 옆에 분홍색 꽃나무가 활짝 피어 있다. 벚꽃나무도 아니고 매화나무도 아닌 이 꽃나무의 정체는 바로 복숭아나무다. 지금 영덕까지 가는 34번 국도에는 복사꽃이 만발하다.

이태백은 복사꽃이 물 위에 떠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별천지)’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연찮게 발견한 복사꽃 툭툭 터지는 이곳을 보니 그가 말하는 곳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쯤 달렸을까? 저만치 청송교도소 이정표가 보인다. 직진하면 청송교도소, 우회전하면 주왕산 가는 길이다. 오래되어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이 청송감호소를 소재로 한 <청송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삭막한 사회보다는 그래도 먹을 밥이 있고, 잠 잘 자리가 있는 감옥이 낫다’는 대사를 읊조리던 걸레 스님 중광. 항상 성속(聖俗)의 경계를 위험하게 넘나들던 그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는 결국 2002년 3월, 삶을 훌훌 던져 버리고 넘실넘실 춤을 추듯 떠나버렸다. 그의 시처럼….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三天大天世界)는 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중광/ '나는 걸레'중


복사꽃과 청송교도소, 4월 중순 청송으로 가는 길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존재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우러져 있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전설 속에 살아있는 패자의 이야기

a 주왕산 대전사 입구, 흐드러진 봄꽃 아래로 관광객들이 붐빈다.

주왕산 대전사 입구, 흐드러진 봄꽃 아래로 관광객들이 붐빈다. ⓒ 김정은

주왕산 입구를 지나 대전사에 도착하니, 솟아오른 기암괴석의 절경이 위풍당당하게 객을 맞이하고 있다.


산이 깊은 만큼 골이 깊고, 골이 깊은 만큼 이야기도 깊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주왕산에 서린 전설 중에는 이국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들이 깃들어있다.

주왕산의 주인공 주왕이라는 사람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주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비상한 재질을 타고났다. 성인이 된 그는 후주의 천황임을 자처하며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당시 수도 장안으로 기세 좋게 쳐들어갔지만 처참하게 대패하였고, 어찌어찌 숨을 곳을 찾아 도망 온 곳이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 이곳 석병산(주왕산의 옛이름)이었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는 반역자 주도가 신라 땅으로 도망갔음을 알고, 신라 조정에게 주도를 잡아 줄 것을 부탁해 왔다. 이에 마일성 장군이 지휘한 신라 토벌군에 대패한 주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서 주왕굴 속으로 숨었다.

어느 날 그는 세수를 하기 위해 굴 입구로 나왔다가 마 장군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한 많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였다.

역사는 철저한 승자의 기록일 뿐 어느 누구도 패자의 아픔은 기록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냉정함이다. 패자의 아픔은 전설이나 설화, 민담 속에 아련한 흔적으로 존재하지만 패자에 대해 잘잘못을 따져 물어 역사로 남기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지도 모른다.

왕을 꿈꾸었던 어떤 자가 꿈을 이루려다가 실패한 채 이국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주왕의 이야기는 주왕산 골짜기 넘어 봉우리마다 굽이굽이 서려있기에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대전사의 오후

a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깃발바위, 일명 기암(旗岩)이 대전사 뒤에 우뚝 서서 관광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깃발바위, 일명 기암(旗岩)이 대전사 뒤에 우뚝 서서 관광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 김정은

대전사는 주왕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깃발바위, 일명 기암(旗岩)이 대전사 뒤에 우뚝 서서 관광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일설에는 신라 토벌군에 쫓긴 주왕이 자신의 군사력을 속이기 위해 기암봉에 이엉을 씌워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지만 신라의 마 장군은 여기에 속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이에 마 장군은 바위임을 알아채고 일거에 공격, 주왕의 군사를 격파한 뒤 대장기를 꽂았다. 이에 기암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노적가리 하니까 얼핏 이순신과 관련한 노적봉이 떠오른다. 이순신이나 주왕이나 봉우리에 이엉을 씌워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한 꾀는 같지만 한 사람은 성공하고, 한 사람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는 상대가 속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장군 이순신에게 속은 상대는 일본군이고, 중국인인 주왕에게 속지 않은 상대는 신라군이었다. 전설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애국심이 작용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 민족이 똑똑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다.

대전사는 일설에 보조국사 지눌이 주왕의 아들 대전 도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곳에 대전사를 짓고, 건너편에 주왕의 딸 백련낭자를 위로하기 위해 백련암을 지었다. 신라 말 892년(진성여왕 6)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창건 당시 웅장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보광전과 명부전뿐이다.

a 대전사전경(1)

대전사전경(1) ⓒ 김정은

특히 이곳에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사명대사에게 보낸 친필 목판 등이 있고, 대전사 앞 하천 건너편에 있는 백련암에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송운정사 터가 남아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유독 중국과 관계가 깊은 지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a 대전사 전경(2)

대전사 전경(2) ⓒ 김정은

주말 오후라서 일까?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는 기대했던 절은 관광객들이 붐벼 어수선했다. 보광전은 참배객과 초파일 연등접수를 은근히 권하는 사람들 때문에 참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번잡했다.

a 대전사전경(3)

대전사전경(3) ⓒ 김정은

보광전의 번잡함과는 달리 마당 한구석에는 3층 이상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허가해 준 군청의 조치에 항의하는 서명운동이 조용히 진행 중이었다. 사실 사람도 없어서 아직 진행 중인지 아니면 이미 종료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썰렁함이 왠지 언짢다. 이곳도 이제 본격적인 돈벌이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일까?

a 대전사 전경(4)

대전사 전경(4) ⓒ 김정은

위풍당당한 기암봉우리는 객의 얼을 빠지게 할 만큼 웅장하고 그윽했지만 그 풍경을 망치는 사람들로 어지럽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뒤로 한 채 대전사를 벗어난 나의 걸음은 주왕의 전설을 찾아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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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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