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좋은 소식만 가져왔던 우체부아저씨

한번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배달하셨다네

등록 2004.04.22 12:45수정 2004.04.22 14:2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금니를 한 쉰 넘은 우체부 아저씨는 배달부를 스물 갓 넘어서 시작했다고 한다. 기다란 끈이 있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산길을 오르던 우체부 아저씨, 그는 언제나 편지를 사립문에 그냥 끼워놓고 가지 않았다. 언제나 "편지요!", 크게 외치고는 사람이 나오길 기다린다.

"마침 계셨구만이라우."
"어디서 왔소?"
"서울서 왔구만이라우. 좋은 소식인갑소."
"애쓰셨구만요. 시장허실 것인디 약주라도 한잔 허실라요?"
"됐어라우. 맹물 한사발이면 되제라우."

그는 우리 집을 한 달에 꼭 서너 번은 다녀갔다. 그러고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는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서툰 한글 솜씨로 다 읽어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희소식이면 같이 즐거워했다.


부고(訃告)는 얇은 노란 봉투에 넣어져 대문간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우체부를 통해서 오는 편지는 모두 희소식인 셈이다. 우체부는 까치보다 더 반가운 메신저였다. 온갖 즐거운 소식을 전해주는 심부름꾼이었다. 담뱃불을 붙여 뻐끔뻐끔 연기를 날리며 잠시 쉬는 중이다.

"어? 요것이 뭣이당가?"
"소액환(小額換)이구만이라우."
"이 거 얼매여? 3에다가 동글뱅이가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네."
"30만원인 갑소. 큰아들이제라우? 뭔 일 하간디 매달 그렇게 돈을 부친다요?"
"공장 기술자요. 핵교도 제대로 못 보냈는디 지기들 쓸 것 안 쓰고 부쳐 오요."
"착실하게 기술 배우면 되는 것이제. 효자를 뒀소. 오지겄소. 찾아다 드리끄라우? 도장만 있으면 되는디…."
"……"

아버지께서 묵묵부답이었던 건 까닭이 있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아버지 속내를 알아보려 부러 떠본 것뿐이다. 어머니께도 맡기지 않았다.

당신께서 손수 면소재지 우체국에 콧바람 쐬러 가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하거니와 동네 사람들에게 출타하시는 모습을 보여 자랑을 늘어놓고픈 심사도 작용했다.

"글면 가볼라요."
"댕겨가싯쇼. 멀리 안 나가구만이라우."


터벅터벅 벌써 송단까지 다섯 마을을 거치고, 우리마을 양지를 돌고 오리(五里)나 되는 방촌에 들러야 한다. 다시 내려와 논두렁길을 가로질러 강례와 평지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깡마른 체구에 모자를 눌러쓴 체모(體貌)만 봐도 이골이 난 듯 하다. 걷고 또 걸으니 살이 붙을 리도 없었다.

화순 북면에 사설우체국이 생기고 나서 30여 년 긴 세월 걷고 걸었다한다. 십리 아래 살았던 그분은 '골안7동' 마을 사람들의 이름은 물론 살림의 규모, 숟가락 숫자도 훤히 알고 있었다.


들길을 가다가 만나면 그 자리에서 뜯어 읽어드리고는 바지춤에 넣어주고 또 길을 나설 뿐 누구에게 대신 맡기고 가는 법이 없는 성실한 분이었다. 윗마을에 한 통 있거든 점방이나 주막 또는 이장 댁에 맡기면, 수월하게 일할 만도한데 배달사고를 염려하고 그 때 이미 서비스의 질을 아셨던지 외고집이었다. 직접 건네주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으신 분이다.

길을 걷는다는 건 얼마나 벅찬가. 평지도 걷기가 힘든데 그 무거운 가방을 지고 걷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지 않고 왔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야 아저씨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반은 끌고, 절반은 타고 다녔다. 자전거에 걸치는 것만으로도 일의 강도는 많이 약해졌지만 폭증하는 물량 때문에 시달리던 우체부 아저씨.

조금 크고 나서는 내가 직접 편지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 어른들께서는 "눈이 침침하시다"며 "까막눈을 가락으로 콕 찔러버리고 싶다"고 하시며 내게 편지를 직접 읽어보도록 했다.

"뜸들이지 말고 언넝 읽어봐."
"알았어라우."

"아버님 어머님 전 상서"

"두 분 다 옥체만강 하옵시고 아우들 모두 학교 잘 다니는지요? 농삿일을 돕지 못한 저희들은 언제나 한번 내려가 함께 할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저희 3남매는 부모님 덕택에 몸 건강히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읍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전번에 보내주신 쌀은 마포에 가서 잘 받아봤습니다. 다음부터는 가까운 청량리로 보내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추신: 금형기계를 하나 장만하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좋겠읍니다.

1978년 4월 22일

서울 하월곡동에서 규대, 규열, 금순이 올림


사실 나는 한번 훑어보고 어른들이 듣기 좋은 부분만 읽고 바로 편지꽂이에 넣어버리곤 했다.

학교 갔다오면서 본 아저씨의 자전거 탄 모습이 아직 선연하다. "달달달"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서툰 솜씨로 돌부리를 피해가느라 힘없이 페달을 밟아대는 그 당시로 봐서 할아버지 줄에 접어든 우체부. 체인을 다시 거느라 낑낑대던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냥 우편물만 배달하면 좀 덜 힘들었겠지만 꼭 사람들 심부름을 해주곤 했던 다정한 살림꾼 노릇까지 얹혀졌으니 얼마나 겨웠을까. 고무줄, 술약, 사카린, 문(門) 종이와 밀가루 포대도 무일푼으로 배달해주셨다.

중학교 2학년 봄날 총총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본 뒤로 다신 그 분을 뵙지 못했다. 오토바이도 타보지 못하고 힘겹게만 산골마을을 내 집처럼 다니셨던 우체부 아저씨는 암으로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고생만 하고 간 그 분의 자리가 어찌나 컸던지 젊은 동네형이 그 일을 이어받았지만 정씨 아저씨의 투철한 삶에는 미치지 못해 못내 늘 아쉽기만 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의대 증원 이유, 속내 드러낸 윤 대통령 발언 의대 증원 이유, 속내 드러낸 윤 대통령 발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