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타임스
40대에 접어든 가정주부 연희는 12년 전 연인인 세중을 기억한다. 그들은 12년 전 폭설로 막힌 도로를 빠져나와 산을 뒤지다가 집을 발견한다. 그 집에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주검이 있다. 갇힌 그들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학과 가학의 격렬한 섹스에 빠진다.
소설은 연희와 세중의 기억과 세 명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 진행된다. 죽은 그들은 누구인가. 세계일주를 꿈꾸며 북에서 남으로 귀순한 남자, 스위트홈을 꿈꾸는 사내, 그리고 그들을 동시에 똑같이 사랑한 여자. 그들 셋은 일처다부제로 살면서 공동체 생활을 해나갔다. 하지만 여자가 임신을 하면서 셋은 죽음에 이르게 된 것.
이 이야기는 참나무, 박새, 청설모, 바람 등을 통해 전해진다. 생물학적 상상력과 추리기법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던 소설은 연희와 세중이 12년 만에 재회하면서 숨을 고른다. 연희는 깨닫는다. 세중과의 사랑과 기억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환상을 손에 넣는 순간, 환멸로 바뀌고 만다는 것을.
작가가 소설의 인물을 빌려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환상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삶의 한 구석에 그대로 둬도 될 환상도 꼭 끄집어내어 실현하려고 안달이다. 사랑을 쟁취하고, 사회적 위치를 정복하며, 어떻게든 '욕망 덩어리'를 삼키려고 한다. 욕망은 집착을 낳고 그만큼 좌절의 깊이도 클 수밖에 없다.
“환상을 품어보고 그것에 좌절하고 나면 환상의 경계와 실체를 알게 될 거예요. 환상을 그대로 두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면 사는 게 좀더 수월해질텐데.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면 왜곡된 욕망에 빠지기 마련이죠.”
많은 것을 이루려는 삶은 숨차다. 적당히 비워둘 것은 그대로 두며 사는 것도 괜찮을 텐데, 사람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라린 채 내달린다. 작가는 <성에>를 통해 독자들에게 나직이 말한다. 환상 속에 존재하는 ‘삶의 여백’을 돌아보라고. 천천히, 쉬어가라고.
'에코 페미니즘' 소설 쓰고파
“작품의 환상 속에 빠져 살았어요. 한 작품을 쓰면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그 정서’로 살아버리거든요. 끔찍한 시간이었어요.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떨어지는데, 방구석에 처박혀 뭐했나 싶어요. 이제 사는 맛이 나요(웃음).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좋은 시간 보내고 있죠.”
환상을 환상인 채로 둘 줄 아는 작가는 그렇게 작품을 세상에 내보낸 뒤 여유 있게 일상을 즐기고 있다. 다음 작품은 10년째 준비중인 에코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한다. “후속작을 발설하면 잘 안 써지는 징크스가 있어서 늘 그렇게 대답한다”며 자세한 얘기는 꺼렸다.
“제 주변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레즈비언 커플도 있고, 호스트바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고, 페미니스트도 있죠. 전 그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여요. 가부장문화에 젖어 있는 마초 같은 남성만 아니라면, 어떤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환상 속에서 ‘삶의 여백’을 발견한 작가다운 말이다. 그렇게 김형경씨는 늘 마음속에 ‘여백’을 마련하고, 그곳에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채우고 있다.
성에
김형경 지음,
푸른숲,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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