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이란 규제가 싫다

이장을 통해 느낀 남성의 특권과 의무

등록 2004.04.25 14:08수정 2004.04.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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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달이 채 지나기 전인 지난 주말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왔다. 오랜 기간 설왕설래 하던 이장을 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금껏 장지의 벌초와 관리는 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의 몫이었다. 9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손위로 형님과 누님이 각각 한 분씩, 그 아래로도 여섯 동생이 있다. 그러나 94년 귀향하신 이래 시골에 유일하게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당신의 5대조부터 할아버지에 이르는 다섯 묘소를 모두 관리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사이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들은 전부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아들이라곤 아버지와 숙부밖에 안 남게 되자 그 부담은 점점 피할 길이 없었고, 이는 대를 이어 나에게 올 공산이 커져만 갔다.

종손인 큰아버지 아들에게 의무의 분담을 요구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내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 묘소를 돌보는 것처럼 나도 내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힘을 보탤 뿐인데, 그들은 그런 아버지가 없지 않는가?

나는 내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같은 생면부지의 어른들 묘소를 정성껏 다듬을 뿐이었다. 불경스럽지만, 나는 그 어른들과 내가 직접적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가계(家系)의 관습적 전통인 묘지관리와 변화된 시대 여건의 충돌은 점점 심해져간다. 어린 시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따라왔던 다양한 관습들의 존속이유에 대해 나는 점점 의문을 키워간다. 큰아버지의 아들인 내 사촌동생들도 나의 연배여서일까? 그들 역시 장묘에 대한 관점이 내 아버지와 현격히 달랐다.


장지가 갖춰진 이상 제대로 관리하자는 믿음을 갖고 있는 내 아버지는 두 달의 한번 꼴로 하루를 꼬박 쓰는 묘지관리에 정성을 쏟아야 했다. 점점 누구도 칭찬하지 않을 의무의 덫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꼴이었다. 전업주부의 노고를 거의 평가해주지 않는 사회나 가정 사처럼 벌초와 묘지관리는 물론이거니와 성묘조차도 아버지의 비용처리와 어머니의 밤을 새는 준비 속에 반복되어 갔다.

졸린 눈을 부비며 내려가면서 내 머릿속을 짓눌러 왔던 것은 '장묘 양식이란게 왜 이다지 사람을 힘들게 해 왔든가'였다.


형식논리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내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나의 조상과 나 사이에 정서적 유대감이 미치는 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위의 어른들이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위의 어른들보다 내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토록 그들을 기리는 각종 행사에 참여해야 했고, 내 외가의 제례는 다 무시했단 말인가? 내가 대단한 '고추'를 달고 태어났기에, 이 엄청난 특권을 갖고 이런 일상의 반복에 무덤덤하게 동참했단 말인가?

말하자면 형식이 실질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나의 자유로운 의식의 많은 부분들이 견고한 세습적 규율들에 속박되어 있다.

14년 만에 유골을 수습해 화장하면서 임종시에 뵈었던 할아버지의 느낌을 애써 되살려 보려 했지만 난 느껴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미 가버린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 외에 그는 육신과 더불어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가 있는 이곳이 아닌 어디인가로 영원히 가버렸다.

이제 나는 할아버지 묘소를 돌보는 매년 몇 차례 일에 동원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고맙지 않다. 그저 십수년 간 시달려온 약간의 두통이 사라진 상태라고나 할까. 아니면 한번도 제대로 펴보지 않지만 늘 가지고 다녔던 두꺼운 영어사전을 가방에서 꺼내 집에 놔두고 다니는 느낌일까?

아무튼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내 아버지는 남성에게 특권이었던 봉제사(奉祭事) 묘지관리를 버렸다. 점점 특권보다 훨씬 무거워가던 의무도 아울러 사라졌다.

호주제라는 제도가 갖는 특권과 의무도 마찬가지다. 호주제를 버려야 여성과 남성에게 평등이 새로 찾아오냐구? 그럼 하잘 것없는 계집애들이 신성한 남성과 대등해졌다고 껍쩍대는 형편없는 세상이 오냐구?

아니 호주제를 버려야 남성들이 잃었던 자유가 돌아온다. 특권인양 손에 고이 쥐고 있어봤자 이제는 쓰일 곳 없는 수많은 과거의 유습들을 이제는 제발 바닥에 내려놓자.

너에게 짐 지워진 형식이란 구시대적 규제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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