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꿈꾸다 천상으로 간 청년

고 유용조씨, 10년여 신장병 투병하며 시 500여 편 남겨

등록 2004.04.27 16:18수정 2004.05.03 06:4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문틈으로 / 추위가 살금살금 기어 들고/ 잠이 솔솔 빠져나간다
이 추위에도 자연은/ 다들 잘도 자는데 / 나 홀로 깨 이 밤 / 오들 오들 떠는 것은 / 자연의 일부가 되지 못한 인간의 외로움 때문인가 / 아직 인간의 탈을 벗지 못한 때문인가 // 아무래도 / 아직은 찬바람 맞아가며 좀더 / 이 세상에서 / 인간으로 살아야겠다"(‘잠' 전문)



a 한양대 전체 수석 합격했을 당시 유용조씨

한양대 전체 수석 합격했을 당시 유용조씨

10년 넘게 신장병으로 투병 중이던 한 젊은 시인 지망생이 50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그의 시처럼 인간의 탈을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먼산 산벚나무 붉게 피었다가 꽃잎 흩날리던 봄날. 내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유용조 아시죠? 용조가 갔어요. 500편이 넘는 시를 써 놓았는데 한번 읽어주셨으면 해서 전화드렸어요. 유고시집이라도 만들었으면 하는데…."

날이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가 내렸다.

올해 나이 서른 다섯. 유용조(청양군 비봉면 신원리)는 지난 1992년 한양대에 전교 수석으로 입학했던 수재였다. 청양농공고를 졸업하고 농협대학에 입학, 두 달을 다니다 그만두고 독학으로 재수, 삼수해 한양대 법대에 들어갔다.

재수하는 동안 독서실 생활로 건강이 나빠져 대학에 입학하면서 신장병을 발견했고 대학 3년 동안 투병 중에도 학업을 계속하다가 4학년 때 병이 악화되고 합병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 학교를 그만뒀다.

아버지의 콩팥을 이식받기도 했고 식이요법으로 잘 견뎠지만 서른다섯 봄을 못 보고 지난 2월 초 이 세상을 떠났던 사실이 뒤늦게 내게 전해졌다. 살아있을 때 시를 쓰는 줄은 알았지만 500여 편이나 써 놓은 줄은 몰랐다가 사후에 그의 방에서 8권으로 묶여진 작품집을 발견한 친구 한장섭(35·청양군 정산농협 목면지소 근무)은 평소 시집을 내고 싶어했던 친구의 바람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a 유용조씨가 생전에 만든 작품집을 어머니 최재희씨가 꺼내 보이고 있다.

유용조씨가 생전에 만든 작품집을 어머니 최재희씨가 꺼내 보이고 있다. ⓒ 김명숙

"용조 성격이 드러내놓고 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데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어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시가 너무 아까워서 한 권이라도 유고시집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신원리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시를 썼던 유용조는 '어떤 편지' '산동네. 꽃이 살다' '천국가는 길' '베짱이의 노래' 등 자신의 시를 종이에 손으로 써서 책 제목과 목차까지 정해 놓았다. 이렇게 가편집을 해놓은 책이 8권이나 되었다. 더러 유빈(貧)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밤 늦도록 / 혼자 . 누군가를 사랑하면 / 할수록 / 같은 깊이로 높이로 / 절로 시는 쌓인다('시' 전문)

아픔을 참아가며 밤 늦도록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사랑하며 글을 썼던 유용조.

벌써 입동도 지났는데 / 모기 한 마리 날아와 / 이마에 앉는다 / 휘휘 손을 내젓다 문득 / 이 추위에 나마저 내치면 / 저 생명은 어디가서 목숨을 부지할까 / 싶어 가만히 있어 본다 / 깨끗하지는 못하지만 내 피 / 그래도 너에게 가서 / 배고픔만이라도 지울 수 있다면 / 실컷 퍼 마셔라(시 '화해' 전문)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잠시나마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아이를 갖고 싶다 / 너를 닮은 // 매일 아침이면 / 깊은 숲 맑은 샘물을 길어다가 / 칭얼대는 꽃잎을 말끔히 씻어주고 / 하루하루 넉넉한 밑거름으로 / 흐린 날에는 맑은 햇살을 지어주고 // 어느 꿀꿀한 날에는 / 애기 민들레를 무릎에 앉히고 / 어미 민들레의 눈부신 전설에 대해서 / 조근조근 가슴에 심어주고 싶다 // 그런 애기 민들레로 키우고 싶다 / 너를 닮은('너를 닮은' 전문)

그런 꿈을 가졌던 무명시인은 자신의 투병생활을 안타깝게 여기는 부모님(유병훈(67). 최재희(64))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지난해 10월 서울 고시원에 들어가 홀로 생활하다 지난 2월 1일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떴다.

세상 모든 문제는 / 죽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중략) / 우리 위태위태한 삶을 / 삶이게 하는 것은 / 난해한 죽음이 느긋하게 기다려주기 때문 아닐까(‘죽음에 대하여' 부분)

그의 시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느긋한 죽음이 있어 삶이 삶이게 하는데 그에게는 느긋하지 않았는지 그는 서둘러 삶을 마감했다.

"그렇게 급하게 갈 줄은 몰랐는데…. 서울서 집에 오면 이곳이 추우니까 감기 걸려서 고생을 했어요. 우리가 그것을 속상해 하면 '이 다음에는 좋은 모습으로 올게요' 늘 그렇게 말했는데 지난 설 때도 감기 걸려서 먹지도 못하고 며칠 누워 있다가 1월 27일 막차 타고 서울 갔는데 며칠만에 좋은 모습으로 다시 온다던 애가 다시 못 오게 됐으니…."

어머니 최재희씨는 용조가 살아 생전에 자신에게 시가 당선되면 제주도 구경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약 타러 서울 병원에 다녀오면 시집을 한 보따리 사서 가져와 읽었다고 전한다.

a 유용조씨가 직접 만들어 남긴 시집들

유용조씨가 직접 만들어 남긴 시집들 ⓒ 김명숙

아들이 떠나고 작품 꾸러미를 태울까 했는데 장섭이가 말리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졌다. 시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던 용조는 김용택이나 안도현 등 국내 이름난 시인들의 시집을 사다가 200배로 확대 복사해 시집처럼 묶어 읽었고 그 뒷면에 자신의 시를 써서 작품집을 만들어 왔다.

엿을 나눠 먹지 않기에 / 요즘 세상 / 끈끈한 맛을 잃어간다 / 끈끈한 정에 굶주린다 // 삶 한가운데를 툭 분지르면 / 너는 속이 꽉 차서 흐뭇했고 / 속이 텅 비어서 나는 마음이 가벼웠다(‘엿' 전문)

속이 텅빈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으로 돌아간 유용조가 남긴 시를 봄비 오는 오후 늦도록 읽으며 "천상병 시인보고 천상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용조가 천상의 시인 같다"고 말하는 친구 장섭의 "다만 한 권이라도 유고시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헛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에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과 우리들이 알아야 할 정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오마이의 전문기자가 아닌 산과 들에 살고 있는 무수한 나무와 풀들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정성껏 글을 쓰며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 필요한 것을 다른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글을 쓰는 시민기자들의 고마움에 저도 작은 힘이나마 동참하고 싶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5. 5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