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속의 한국 '가평대대'를 아시나요?

[호주현지보고]해마다 '가평의 날'을 기념하는 호주육군 3대대

등록 2004.04.29 01:04수정 2004.04.2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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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평전투 참전 용사들. 오른쪽부터 프랑크 윈터스, 에디 라이트, 도널드 비어드 등.

가평전투 참전 용사들. 오른쪽부터 프랑크 윈터스, 에디 라이트, 도널드 비어드 등.

"죽창과 곡괭이 자루를 든 중공군 1개 분대가 참호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나는 총을 쏘면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막 소리지르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아내가 물 한 잔을 가져다 줍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프랑크 K. 윈터스(73). 한국전쟁 당시 20살이었던 그는 아직도 53년 전의 가평 전선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난생 처음 가봤던 나라, 한국의 4월이 엘리엇의 시 <황무지>만큼이나 잔인했기 때문이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대개 2, 3시경. 잠옷 차림의 아내가 가져다 주는 물을 마시고 나면 윈터스는 거실로 나가 밤을 지새운다.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전투를 벌여야 했던 가평 전투에서처럼.

목숨 걸고 가평 전선을 지켜낸 호주 군인들

a 가평대대에 게양된 태극기와 호주 국기. 호주 국기 아래 한국에서 가져온 3·8선 구조물이 있다.

가평대대에 게양된 태극기와 호주 국기. 호주 국기 아래 한국에서 가져온 3·8선 구조물이 있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를 계속했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이용하여 서울-춘천간 도로를 차단하여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가평 북방 8Km 지점에 있는 목동리 504고지에 배치된 호주 3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일단 후퇴했다.

4월 23일 밤 10시경, 6사단을 추격하던 중공군 118사단의 선두 연대는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 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서 진격하던 중에 공격을 받았다. 호주 3대대의 배치 상황을 전혀 몰랐던 것.


3대대의 기습 공격을 받고 일단 후퇴한 중공군은 24일 0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해왔다. 그후 호주 3대대와 중공군의 일진일퇴 공방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4월 24일, 날이 밝자마자 연합군의 항공 폭격과 포병 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사체를 남겨둔 채 급히 철수했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과 맞선 호주 3대대가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믿기 어려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호주 3대대의 피해 상황은 전사 31명, 부상 58명, 실종 3명이었다.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 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51년 4월 26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춘계 대공세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모택동에게 작전 상황을 보고했다.

이로써 중공군에 의한 연합군 전선의 분할 기도는 저지됐고, 연합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가평대대의 저지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호주 3대대는 그 공로로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고 가평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또한 호주 3대대는 1대대와 2대대를 제치고 호주 최고의 정예부대로 인정받아 붉은 베레모를 쓰는 공수부대가 됐다.

호주 육군은 가히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평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4월 24일을 '가평의 날'로 정하고 매년 가평 퍼레이드 등의 행사를 통해 호주 군인의 용맹스런 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불과 4일 후인 50년 6월 29일,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호주는 9월 28일,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으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호주 육군 3대대를 부산항으로 보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의 병력과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 육군: 2대 대대 및 지원부대 1만657명
- 해군: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4507명
- 공군: 1개 전투기 대대 2000명
- 사망자 : 339명(281구는 부산 유엔묘지에 안장)
- 부상자 : 1216명
- 포로: 29명(휴전 후에 송환됐다)


'호주 속의 한국' 가평대대 연병장에서

a 가평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가평대대 현역병들

가평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가평대대 현역병들

"헤이 피터! 마령산전투가 뭐 그리 대단했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나?"
"프랑크, 자네가 아직도 살아있었나? 설마 유령은 아니겠지?"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두 노인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목이 메는지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등 뒤에서 펄럭이던 태극기와 호주 국기도 잠깐 동안 펄럭임을 멈추고….

해마다 4월 23일에 벌어지는 '가평 퍼레이드'를 참관하기 위해서 두 참전 용사가 홀스워디 군사 기지에 위치한 호주육군 3대대, 일명 '가평대대'를 찾았다. 그들이 50여 년만에 만나는 장면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서부 호주의 퍼스에서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비행기를 타고 온 프랑크 윈터스는 호주 육군의 전설이 된 '가평전투' 출신이고, 피터 코인(74)은 휴전 직전까지 중공군과 대치했던 마령산전투 출신이다.

같은 3대대 출신이라도 가평전투 출신의 참전 용사들은 가평전투 출신이 아닌 참전 용사들을 한 수 아래로 본다. 가평 전투가 그만큼 참혹했고, 호주 주요 전사에 기록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정신병을 앓은 한국전쟁 영웅

a 가평대대에 입구에 설치된 가평전투 참전용사 모형

가평대대에 입구에 설치된 가평전투 참전용사 모형

가평의 날 바로 다음 날인 4월 25일, 호주국영 SBS-TV는 'KOREAN ANZACS'라는 타이틀의 한국전 참전용사에 관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르던 1951년, 론 캐시맨(72)은 19살의 어린 나이에 참전하게 됐다. 전쟁 영웅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원 입대했던 것. 그러나 그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세번씩이나 큰 부상을 당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전쟁 영웅으로 귀환한 캐시맨은 곧바로 결혼했다. 그는 참전용사들에게 지급하는 보상금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호주로 귀환해서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캐시맨은 어머니가 포도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캐시맨은 중공군의 기습을 떠올리면서 최초의 발작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중공군의 기습 침투 때 들었던 소리와 같았던 것. 그는 갑자기 마당에 있던 나무 막대기를 들고 어머니와 아내를 향해 총을 쏘는 흉내를 냈다. 그러나 그건 흉내가 아니었다.

정신병의 일종인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가 나타났던 것. 그후 40년 동안 캐시맨은 정신병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그는 상이용사 전용 병원인 콩코드 병원의 정신병동에 25년 동안이나 입원했다. 병원에서도 발작 증세는 계속됐고 전쟁의 상흔은 그의 생애를 통째로 파괴해 버리는 듯했다.

a 호주 동포 최영길씨가 가평전투 참전 용사들과 반갑게 만나고 있다

호주 동포 최영길씨가 가평전투 참전 용사들과 반갑게 만나고 있다

그러던 1989년, 마령산 전투를 함께 치렀던 전우 에디 라이트(73)가 캐시맨에게 최면술 치료법을 권유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의사와의 최면 대화를 통해서 정신적 외상이 서서히 치료되기 시작한 것. 다음은 캐시맨이 최면 상태에서 정신과 의사와 나누었던 대화 기록의 일부다.

의사: 당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풍경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 어디입니까?
캐시맨: 마령산 근처의 산봉우리였습니다. 참호에서 밤을 지내고 나서 새벽에 밖을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산봉우리만 조금 보이는 풍경이었는데 황홀할 정도였습니다.

의사: 그러면 당신의 기억 중에서 가장 나쁜 것들은 무엇입니까?
캐시맨: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절친했던 전우 두명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일입니다. 그들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중공군에게 포위 당했는데 그때마다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의사: 이젠 됐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나쁜 기억들을 전쟁터에서 사용했던 군용가방에 집어넣으십시오. 그리고 그 가방을 안개가 자욱했던 산봉우리 아래로 던져버리면 됩니다.
캐시맨: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면술 치료를 받은 캐시맨은 마침내 참혹한 기억들을 다 털어낼 수 있었다. 가위 눌림과 같은 악몽은 사라졌고 더 이상 중공군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003년은 한국전쟁 휴전 50주년이었다. 캐시맨은 전우였던 에디 라이트 등과 함께 50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맨 먼저 부산으로 달려가서 유엔군 묘지에 잠들어있는 전우들에게 참배했다.

그 다음 마령산으로 가서 전쟁의 상흔을 담은 군용 가방을 산 아래로 집어던졌다. 그곳엔 호주 3대대에 파견되어 캐시맨에게 훈련받았던 한국인 이민방씨와 김형규씨도 함께 있었다.

신문 광고 등의 수소문 끝에 찾아낸 두 사람과 50년만에 만난 캐시맨은 잃어 버렸던 50년을 다시 찾은 듯 기뻤다. 그는 호주에 돌아와서도 가평대대 전우들과 만나 한국전쟁 당시를 담담하게 회고할 정도로 정신병 증세가 호전됐다.

호주 속의 작은 한국 가평 대대

a 서부 호주 퍼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프랑크 윈터스

서부 호주 퍼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프랑크 윈터스

2004년 가평 퍼레이드를 취재하기 위해서 찾아간 가평 대대 입구엔 부대 정문으로 사용하는 '가평 라인스(Kapyong Lines)'라고 쓰인 대형 아치가 세워져 있고, 아치 바로 옆엔 가평전투 참전 용사의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대대 본부 건물 앞엔 대형 태극기와 호주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고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엔 한국에서 가져온 3·8선 표식 콘크리트 구조물이 놓여있다.

가평의 날을 맞아 구내 매점에선 매년 포도주 공장에 의뢰해서 만든 가평 데이 와인을 팔았다. 가평전투 전쟁기념관에 가보니 각종 자료사진과 함께 가평 전투와 마령산 전투 등의 전쟁 일지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게다가 만나는 참전 용사들마다 가평, 마령산, 임진강, 사리원 등의 지명을 유창한 한국 발음으로 거론하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 마치 호주 속의 한국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행사가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부대를 방문한 사람들이 3대대 연병장으로 모여들었다. 가평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다. 가평 퍼레이드는 가평 전투 정신을 기리는 사열식과 분열식 등으로 거행된다.

2004년 가평 퍼레이드 사열관인 D. 모리슨 장군은 치사를 통해 "현재 이라크에 파병된 3대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의 안전을 기원하자"고 말했다. 가평대대는 호주 육군의 정예부대라서 항상 해외 파병 0순위 부대다.

a 가평 데이 와인을 들고 있는 가평대대 현역병들

가평 데이 와인을 들고 있는 가평대대 현역병들

퍼레이드가 끝나자 연병장 여기저기서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그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호주 동포 최영길(70)씨가 가평전투 참전 용사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평안북도 출신의 최영길씨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전쟁을 맞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압록강 쪽으로 북진하던 호주 3대대에 합류하여 휴전될 때까지 3년 동안 3대대의 의무병과 병참병으로 근무했다. 그후 가평 대대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친 최영길씨는 역시 가평대대의 초청으로 호주로 이민하여 한국인의 호주 이민 제1호가 됐다.

가평 전투 당시 최영길씨의 직속 상관이었던 군의관 도널드 비어드 예비역 대령이 멀리 아델레이드에서 왔다. 그에게 거수 경례를 올린 최영길씨가 한 마디 했다.

"군의관님, 17살짜리 소년에게 다 죽어 가는 부상병들을 맡겨놓고 전부 나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이봐 초이, 난들 그 생지옥 속으로 나가고 싶었겠나? 그땐 정말 비참했어. 제대로 치료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간 병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와."

가평전투 당시 17살의 소년이었던 최영길씨가 백발이 성성한 70살의 노인이 되어 용맹스럽기 그지없던 가평대대 용사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던 2004년 가평의 날은 어느덧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최영길씨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전 지금도 가평 계곡을 뒤덮었던 중공군의 시체더미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전쟁은 죄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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