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만든 추억의 빵

500원 크림빵에 든 추억의 무게는 얼마일까

등록 2004.05.03 06:17수정 2004.05.0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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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마켓의 빵 판매대 앞에서 우연히 낯익은 빵 하나를 보는 순간 갑자기 온 몸이 떨리면서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고작 빵 하나일 뿐인데 왜 이토록 가슴이 마구마구 뛰는 것일까?


결국 누가 가져갈까봐 조심조심 문제의 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수중에 이 빵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할 뿐이다. 갑자기 비닐봉투 위에 쓴 너무도 낯익은 글씨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크. 림. 빵….'

아주 어렸을 적이다. 먹을 게 그리 흔하지 않던 시절, 심부름 잘했다고 동전 한닢 받으면 어김없이 가게에 들어가 자주 사먹던 간식거리중 유독 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크림빵'이요 또 하나는 '라면땅'이었다.

크림빵으로 별을 만든다?

a 가격만 바뀌었을 뿐 포장도 그대로인  500원짜리  추억의 크림빵

가격만 바뀌었을 뿐 포장도 그대로인 500원짜리 추억의 크림빵 ⓒ 김정은

호떡같이 둥그레하고 넓적한 빵 표면에는 어김없이 젓가락으로 쿡쿡 찍은 듯한 구멍이 뚫려있고 빵 두 개가 서로 마주 본 중간에는 투박하고 거친 단맛의 흰색 크림이 발라져 있는 크림빵.

이 크림빵을 좀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 양 쪽으로 붙어있는 빵을 분리해서 각각의 빵표면에 붙어 있는 흰색 크림을 먼저 핥아 먹곤 했다. 이로 인해 흰색 크림이 묻은 콧등과 입 주위가 어찌나 우스워 보였던지.


그 뿐인가, 예전 흑백TV에서 가장 자주 나온 코미디의 소재로도 크림빵은 자주 사용됐다. 어린아이가 둥그런 크림빵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할 일 없는 삼촌이 나타난다.

삼촌은 조카가 먹는 빵을 빼앗아 먹기 위해 조카에게 이런 제의를 한다. 이 빵으로 별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 때 별을 만들어준다는 그 빵은 자르기 쉽고 넓적한 크림빵일 때가 많았다.


10원짜리 크림빵과 라면땅을 양 손에 쥐고 행복했던 그 시절, 가격도 저렴하고 분량도 많은 이 간식거리는 당시 나를 포함한 아이들에게 대단한 인기였다. 그러나 이 크림빵은 80년대 경제가 나아지면서 고급스러워진 소비자의 입맛을 끌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그러한 퇴장은 경쟁사회에서 예견된 퇴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크림빵이 거의 30여 년도 더 지난 오늘,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있다. 하긴 요즘 복고가 유행이라서 새우깡과 계란과자와 같은 장수과자가 여전히 잘 팔리고 있고, 고소미니 사브레같은 옛날 과자들과 예전에 교사와 학부모로부터 억울하게 불량식품이라는 멍에를 썼던 쫀드기같은 것도 추억의 먹거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추억의 제품들이 과연 옛날의 그 맛과 추억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고인의 유언으로 재탄생된 추억의 빵

그렇다면 크림빵은 어떻게 다시 슈퍼마켓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런 저런 궁금증으로 관련자료를 찾아본 결과, 이 크림빵의 재탄생은 삼립식품 고(故) 허창성 명예회장이 현재 삼립식품 회장인 둘째아들 허영인(55)회장에게 "옛날 그대로의 크림빵을 다시 만들어 봤으면 한다"고 병상에서 밝힌 소원 덕분에 다시 만들어졌다.

부친 허 명예회장이 별세하자 허 회장은 2003년 '크림빵'에 대한 본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갔다. 다행히 주위의 복고바람과 맞아떨어져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도 북한 선수단에 제공되어 인기를 끌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고서야 우리동네 슈퍼마켓까지 들어올 정도로 유명해진 크림빵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만든 삼립 크림빵. 단지 복고 분위기에 편승한 상술이라고 보기엔 사연이 너무 뭉클했다.

추억과 사연이 뒤범벅된 빵 봉지를 뜯어 빵조각 하나를 입에 물었다. 소다 맛같은 약간 씁쓸한 빵맛과 거칠지만 단 크림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음, 바로 이 맛이었을까? 지금은 아스레한 기억속에만 있는 맛. 결코 고급스럽다고 할 수 없는 이 편안한 맛. 지금은 예전 물가를 고려해 10원짜리 크림빵이 아닌, 500원짜리 크림빵으로 변했지만 그 맛만은 그대로인 것같다. 문득 영화 <스모크> 속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한 번은, 그가 여왕과 내기를 했어.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잴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 이상하긴 하지. 그건 영혼의 무게를 잰다는 얘기같은 거니까. 하지만, 월터경은 똑똑한 사람이었다구.

일단, 그는 피우지 않은 담배를 저울에 달았어. 다음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피우면서 그 재를 조심스럽게 저울 접시에 떨었어. 그리고 다 피운 담배를 재가 있는 그 저울에 올려놓고 난 다음에, 그 무게를 잰 거야. 그리고 그 무게를 안피운 담배의 무게에서 뺀 거지. 그 차이가 바로 담배 연기의 무게야."


정말 이 대사처럼 담배연기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크림빵에 들어 있는 내 추억의 무게를 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의 내 머리의 무게를 잰 다음 크림빵을 먹으면서 크림빵에 대한 예전의 추억들을 마구마구 떠올리는 거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지나 머리 속이 개운해지면 다시 머리 무게를 재서 미리 재놓은 머리 무게에서 지금의 머리 무게를 재는 거지 그 무게 차이가 바로 추억의 무게 아닐까?"

이 상상을 보고 독자들은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이전 머리 무게나 지금 머리 무게나 다른 것이 없는데 갑자기 얼토당토 않은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가?"

그런 독자들에게는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추억을 곱씹으려면 먼저 머리 속에 굳게 파묻힌 추억의 고리를 열어놓는 것이 필요할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바보 짓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이다. 비록 저울상의 머리 무게는 변한 것이 없겠지만 추억을 곱씹으면서 맑아지는 머릿속 무게는 분명 마음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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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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