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심판 기간에 관저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청와대
노 대통령을 오랜만에 만난 이 참모는 속내를 털어놓은 대통령에게서 실제로 '내공의 힘'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참모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만든 내공의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 자신도 그것을 실감하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힘의 근원'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갖게 된 흔치 않은 '성찰'과 '학습효과'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대통령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인력으로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이 되기도 어렵지만 대통령을 하다가 직무가 정지되어 두 달 가량 성찰과 학습할 기회를 갖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경험했다. 그 이유가 어쨌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탄핵은 임기 내내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도 지난 4월 21일 열린우리당 선대위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이번 선거 결과로 나타난 민심을 '앞으로 조심조심 정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정치라는 것이 잠시라도 방심하면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면서 "이제는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정치를 하도록 하자"고 했다. 국정운영을 운전에 비유하면 이제는 '조심스런 방어운전'을 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 참모도 탄핵 경험은 노 대통령이 앞으로 남은 4년 동안 '조심조심'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유행가 가사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노 대통령 "지난 1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안해본 것 없이 다해봤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안해본 것 없이 다해봤다"면서 "이제는 한발 비껴서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선대위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당(黨)·청(靑)의 정치적 대화채널로 지목한 문희상 전 비서실장이 당선자 워크숍에서 했던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문희상 당선자는 당시 총선 후 국정 운영과 관련해 "노 대통령이 연속성이 있는 중요한 문제는 (본인이) 직접 챙기겠지만 총리에게 많은 것을 넘겨주고 한발 물러나서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문 당선자는 '국정에서 한발짝 물러나겠다'는 의미에 대해 "대통령은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국정운영 방향은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언행 등에서 연유한다고 보고 한발짝 물러나 조심하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앞서의 참모와 문희상 당선자뿐만 아니라 주변 참모들에게도 '한발 물러나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얘기를 자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말한 '영속성 있는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국가발전을 위해 꼭 챙겨야 할 장기적인 국정과제이다. 그것은 정부혁신과 분권(分權), 그리고 과학기술혁신으로 요약된다.
정부혁신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계속되어야 할 국정과제이고,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의 분권은 물론 중앙정부간의 분권도 노 대통령의 핵심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 기틀이 바로 국가균형발전과 3대 특별법 공포이다.
노 대통령의 과학기술혁신 의지는 차세대 10대 성장동력 선정과 이공계 우대정책 추진으로 요약된다. 거기에다가 과학기술부장관의 기술부총리 승격과 국가 과학기술혁신체계 구축 등이 포함된다. 노 대통령이 '참여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 보수 인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명 전 동아일보 사장을 과기부장관에 기용한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집권2기 관료·전문가그룹으로 대체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집권2기 국정운영과 관련,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격에 맞게' 기술부총리로 승격되는 과기부장관으로 입각을 희망하는 것은 '김치국 먼저 마시기'일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의 스타일상 이른바 차기 대권주자들의 '보직관리'를 위해 국정과제를 흔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단기간에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운 중장기 국정과제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으로서는 이런 중장기 국정과제의 비전과 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참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영속성 있는 중요한 문제'를 챙기다보면 자연히 '국정에서 한발 비껴선 것'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국정에서 한발 비껴 서겠다'는 것은 정부혁신과 분권, 그리고 과학기술혁신의 세 가지 국정과제를 직접 챙기겠다는 것과 통한다.
이런 국정운영 방향은 분권론자인 노 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구상해온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도 최근 "노 대통령은 원래 총선 전까지 1년 동안 국정운영 시스템을 짜고, 총선이 지나면 중요하지만 5년 단임제이기 때문에 사장되기 쉬운 장기적인 국정과제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노 대통령의 직무복귀를 앞두고 집권2기 청와대 비서진이 '소리소문 없이' 교체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는 '조용한 보좌'를 강조하는 김우식 비서실장 취임 이후 계속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 중요한 흐름은 이른바 '코드'가 일치하는 측근 기용에서 관료·전문가 발탁으로의 이행 조짐이다.
지난 4일에는 박주현 청와대 참여혁신수석이 공식으로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참여정부 초기 수석비서관 6명 가운데 4명이 청와대를 떠나게 되었다. 이미 문재인 전 수석과 이호철·박재호 전 비서관 등 '부산파'와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 서갑원·김만수 전 비서관, 고성규 전 민정수석보좌관 등 '386그룹'에 이어 박주현 수석·이석태 비서관 등 '민변그룹'이 떠난 자리에는 관료·전문가그룹으로 대체되는 경향이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같은 인사들이 지난 1년여 동안 국정운영의 '로드맵'을 마련한 만큼, 집권2기에는 이를 관리 운영할 외부 관료·전문가들이 대통령을 보좌해야 한다는 논거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도 아니면 모'를 좋아하는 노 대통령이 총선 승리로 사실상 새로운 임기가 시작되는 만큼 정치는 여당에 맡기고 청와대는 국정을 꼼꼼히 챙길 '관리형 참모진'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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