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18일 광주 망월동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노무현 대통령.
부산상고 출신의 조세 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아 시국사건에 관심을 갖고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호철 부산대 학생회장 등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전한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의 진상을 알고서부터이다.
그리고 노무현 변호사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국회의원 노무현'이 되어 나타났다. 억세게 보이는 일자 주름살이 깊이 패인 순박한 얼굴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으로 '무장'한 채, 전혀 선량(選良) 같지 않은 모습으로 '5공 청문회'장에 나타난 노무현 의원은 날카로운 질문과 '전두악'에게 명패를 던지는 선명한 행동으로 8년 동안 숨죽이고 살아온 광주시민들의 한을 풀어주는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광주사태' 발생 24년만에 '호남 고립주의'에서 '영남 고립주의'로 바뀐 셈
그러나 뿌리 깊은 지역주의의 골은 패기로 똘똘 뭉친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부산시장 선거를 포함해 부산에서만 내리 3번을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97년 초 '정권교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이라는 명제에 동의해 영남에서는 십중팔구가 반대하는 '김대중당'(새정치 국민회의)에 들어가 부총재를 맡았다.
김대중 총재는 호남 고립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이른바 '지역 등권주의'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른바 'DJP 연합'을 실현시켜 그동안 부족했던 '2%'를 채워 마침내 헌정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두번의 총선과 한번의 대선이 더 있었다. 결과는 여전히 지역주의 선거였다. 그러나 변화는 컸다. 가장 큰 변화는 지난 4·15 총선에서 '영남 고립주의'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은 영남에서 소수 의석이나마 확보해 전국 정당의 교두보를 마련한 반면에,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집권할 때의 '조직사건'을 연상케 하는 '영남지역당'으로 전락하는 조짐을 보였다.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24년만에 '호남 고립주의'에서 '영남 고립주의'로 바뀐 셈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느 지역이건 '고립주의'는 국가균형발전과 국민통합의 적이다. 그래서 여야는 너나없이 상생(相生)의 정치를 외친다. 문제는 실천이다. 이른바 '전·노 일당'으로 상징되는 쿠데타 세력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서와 화해로도 끊지 못했던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어쩌면 2004년 5월 광주는 그 발본(拔本)의 시원(始原)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시원이 되어야 한다. 그럴 만한 조짐은 있다.
"호남과 화해하지 않으면 집권도 쉽지 않을 뿐더러 국가적으로 불행"
우선 한나라당이 변하고 있다. 두번의 대권 실패에 이은 총선 패배로 '씨 없는 수박'이라는 조롱 섞인 농담을 듣는 한나라당은 광주와의 근본적 화해 없이는 집권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늘 광주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광주를 짓밟은 전·노 일당과는 거리가 있는 박근혜 대표 체제의 등장과 변화의 노력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의 전략기획통으로 통하는 윤여준 의원은 지난 총선 기간 광주를 방문한 박근혜 대표를 환영해준 광주 시민의 표정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읽었다고 말한다.
과연 호남 사람들이 한나라당 점퍼를 입은 박근혜 대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윤 의원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래서 윤 의원은 광주에 사는 친지에게 부탁해 박 대표의 행선지를 알려주며 시민들의 반응을 소상하게 관찰해 알려달라고 부탁했었다. 결과는 그 친지조차 놀랐다는 것이었다. 충장로의 광주 시민들은 전혀 스스럼없이 박 대표를 맞이하거나 자발적으로 악수공세를 펼쳤다.
이회창 후보 시절부터 '호남과 화해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은 집권할 수 없다'고 조언해온 윤 의원이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경우 광주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일부 다닌 인연이 있음에도 차가운 근엄함 때문에 광주 시민에게 정서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윤 의원 자신도 광주 시민들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세월의 탓일 수도 있겠다. 80년 5월 광주 이후 4반세기가 흘렀다. "박근혜 대표가 누구인지 아냐"고 물으면 "박정희 부인 아니에요?"라고 답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인 요즘이다.
알다시피 '전·노 일당'은 박정희 독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노 일당은 박정희 군부독재가 키운 '사생아'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박 대표는 거기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박 대표가 광주에서 뜻밖의 환영을 받은 것도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윤 의원은 "그런 문제로 박 대표와 깊이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고 전제하고 "박 대표가 광주문제에 어떤 평가를 하는지는 잘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5·18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광주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당선자 전원, 그리고 박근혜 대표 등 5·18 기념식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