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에서 '상생 정치' 싹틀까

[정치 톺아보기 63] 노 대통령과 5·18, 그리고 한나라당

등록 2004.05.13 18:01수정 2004.05.17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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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光州)는 고립무원의 '섬'이었다.

80년 5월 광주의 한장면. 그때는 이랬다.
80년 5월 광주의 한장면. 그때는 이랬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길은 봉쇄되었으며 광주에서 타지로 나가는 모든 것이 검열되었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신부(神父)이건 '양아치'이건, 활자(活字)이건 유언비어(流言蜚語)이건 죄다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계엄령과 휴교령이 내려 하는 수 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 집으로 내려가던 필자의 친구 중에는 톨게이트에서 검문을 받고 단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무대에 끌려가 3주 동안 갖은 문초를 받고서야 풀려난 이도 있었다.

"너 이 새끼 데모 하다 왔지?
게다가 '전라도 따블백'이구먼"


그 시절 군대에 있던 광주의 아들딸들은 부모형제와 지인들에게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진짜 혹세무민'의 편지를 써야 했다. 그 사정은 이렇다.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광주에서의 피의 저항에 당혹했다. 광주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는 발 없는 소문이 해외에까지 퍼져나갔고, 군부정권 집권을 위해 기획된 이 피의 참사의 배후에는 '신현악'과 '전두악'이 있다는 자보(字報)가 끊이지 않았다. 신현확 국무총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만만한 게 병졸들이었다. 신군부는 이른바 '광주사태'를 진압한 후에 전라도 출신 군 입대자들에게 의무적으로 10통씩 편지를 쓰게 했다. 도입부만 자신의 개인사를 쓰고 본론과 결론은 짜여진 각본대로 쓰는 '관제편지'였다. 요컨대 '광주사태는 김대중 등 일부 정치인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이므로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 골자였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선무공작'이었다. 그 시절에만 해도 군에서 전라도(출신)는 변방의 '하와이'였고 '따블백'(더블 백) 신세였다. 그 무렵 재학중에 입대한 필자 또한 그 이이제이 공작에 예외 없이 동원되었다. 1인당 10통씩 부쳤던 '이등병의 편지'의 우표값은 월말에 월급에서 깠던 기억이 난다. 병장 월급이 몇천 원 하던 시절이다. 벼룩의 간을 빼먹은 셈이다.

그 시절을 겪은 광주·전남 출신의 재학중 입대자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지만, 필자 또한 고참들로부터 이유 없이 얻어터지곤 했다. 고참들이 대는 이유가 있긴 있었다. 대개는 이런 것이었다.


"너 이 새끼 데모 하다 왔지? 게다가 '전라도 따블백'이구먼."

2003년 5월18일 광주 망월동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노무현 대통령.
2003년 5월18일 광주 망월동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노무현 대통령.

부산상고 출신의 조세 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아 시국사건에 관심을 갖고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호철 부산대 학생회장 등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전한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의 진상을 알고서부터이다.

그리고 노무현 변호사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국회의원 노무현'이 되어 나타났다. 억세게 보이는 일자 주름살이 깊이 패인 순박한 얼굴과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으로 '무장'한 채, 전혀 선량(選良) 같지 않은 모습으로 '5공 청문회'장에 나타난 노무현 의원은 날카로운 질문과 '전두악'에게 명패를 던지는 선명한 행동으로 8년 동안 숨죽이고 살아온 광주시민들의 한을 풀어주는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광주사태' 발생 24년만에 '호남 고립주의'에서 '영남 고립주의'로 바뀐 셈

그러나 뿌리 깊은 지역주의의 골은 패기로 똘똘 뭉친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부산시장 선거를 포함해 부산에서만 내리 3번을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97년 초 '정권교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이라는 명제에 동의해 영남에서는 십중팔구가 반대하는 '김대중당'(새정치 국민회의)에 들어가 부총재를 맡았다.

김대중 총재는 호남 고립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이른바 '지역 등권주의'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른바 'DJP 연합'을 실현시켜 그동안 부족했던 '2%'를 채워 마침내 헌정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두번의 총선과 한번의 대선이 더 있었다. 결과는 여전히 지역주의 선거였다. 그러나 변화는 컸다. 가장 큰 변화는 지난 4·15 총선에서 '영남 고립주의'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은 영남에서 소수 의석이나마 확보해 전국 정당의 교두보를 마련한 반면에,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집권할 때의 '조직사건'을 연상케 하는 '영남지역당'으로 전락하는 조짐을 보였다.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24년만에 '호남 고립주의'에서 '영남 고립주의'로 바뀐 셈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느 지역이건 '고립주의'는 국가균형발전과 국민통합의 적이다. 그래서 여야는 너나없이 상생(相生)의 정치를 외친다. 문제는 실천이다. 이른바 '전·노 일당'으로 상징되는 쿠데타 세력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서와 화해로도 끊지 못했던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어쩌면 2004년 5월 광주는 그 발본(拔本)의 시원(始原)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시원이 되어야 한다. 그럴 만한 조짐은 있다.

"호남과 화해하지 않으면 집권도 쉽지 않을 뿐더러 국가적으로 불행"

우선 한나라당이 변하고 있다. 두번의 대권 실패에 이은 총선 패배로 '씨 없는 수박'이라는 조롱 섞인 농담을 듣는 한나라당은 광주와의 근본적 화해 없이는 집권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늘 광주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광주를 짓밟은 전·노 일당과는 거리가 있는 박근혜 대표 체제의 등장과 변화의 노력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의 전략기획통으로 통하는 윤여준 의원은 지난 총선 기간 광주를 방문한 박근혜 대표를 환영해준 광주 시민의 표정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읽었다고 말한다.

과연 호남 사람들이 한나라당 점퍼를 입은 박근혜 대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윤 의원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래서 윤 의원은 광주에 사는 친지에게 부탁해 박 대표의 행선지를 알려주며 시민들의 반응을 소상하게 관찰해 알려달라고 부탁했었다. 결과는 그 친지조차 놀랐다는 것이었다. 충장로의 광주 시민들은 전혀 스스럼없이 박 대표를 맞이하거나 자발적으로 악수공세를 펼쳤다.

이회창 후보 시절부터 '호남과 화해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은 집권할 수 없다'고 조언해온 윤 의원이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경우 광주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일부 다닌 인연이 있음에도 차가운 근엄함 때문에 광주 시민에게 정서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윤 의원 자신도 광주 시민들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세월의 탓일 수도 있겠다. 80년 5월 광주 이후 4반세기가 흘렀다. "박근혜 대표가 누구인지 아냐"고 물으면 "박정희 부인 아니에요?"라고 답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인 요즘이다.

알다시피 '전·노 일당'은 박정희 독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노 일당은 박정희 군부독재가 키운 '사생아'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박 대표는 거기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박 대표가 광주에서 뜻밖의 환영을 받은 것도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윤 의원은 "그런 문제로 박 대표와 깊이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고 전제하고 "박 대표가 광주문제에 어떤 평가를 하는지는 잘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5·18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광주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당선자 전원, 그리고 박근혜 대표 등 5·18 기념식 참석

"광주에서 사랑받고 싶다"  2004년 3월28일 광주 망월동을 찾아 박관현 열사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광주에서 사랑받고 싶다" 2004년 3월28일 광주 망월동을 찾아 박관현 열사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오마이뉴스 이승후
이회창 총재 시절에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인 '쇄신연대' 의원들은 개혁을 도모하면서 추가로 3인의 중진의원에게 참여를 요청하며 영입한 적이 있다. 윤여준과 이부영, 그리고 박근혜 3인이었다. 윤 의원은 "소장파의 신망을 받고 있는 박 대표의 개혁의지와 변화 노력은 대단하다"면서 "호남과 화해하지 않으면 집권도 쉽지 않을 뿐더러 국가적으로 불행이라는 것을 박 대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표가 '뉴한나라당' 의원들을 대동하고 다시 광주를 찾아 5·18 기념식에 참석하는 날에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전원이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서 거행되는 제24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과거 민주당 지도부와 광주·전남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5·18기념식에 참석한 경우는 있어도 중앙당 방침에 따라 국회의원(당선자) 전원이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열린우리당 당선자 전원의 5·18기념식 참석은 내달 5일 치러지는 전남지사 보선을 의식한 '호남민심 잡기' 차원으로 폄훼하기도 하지만 그리 볼 일만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는 민주화세력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원내 1당이 된 의미를 갖는다. 민주화 세력이 80년 광주항쟁 이후 87년 6월 항쟁으로 씨를 뿌리고 97년 정권교체로 뿌리를 내리더니, 지난 총선에서 24년 만에 꽃을 피운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 역사적 의미를 5월 광주에서 사회정의에 눈뜬 노무현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1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기각결정으로 직무에 복귀할 경우, 15일 10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데 이어 직무복귀 후 첫 외부행사로 광주항쟁 24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열린우리당 당선자 전원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표와도 첫 상견례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15일 제주도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 참석요청을 물리고 첫 외부행사로 광주를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한총련 학생들의 기습시위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런데도 사실상 집권2기를 맞이한 노 대통령이 직무복귀 이후 첫 외부행사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은 대통령 취임 당시의 국립묘지 참배와 비슷한 무게를 갖는다.

헌재의 탄핵소추 기각으로 다시 태어난 노 대통령이 광주에서 밝힐 '상생의 정치'는 5월 광주의 '대동(大同)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있다. 노 대통령에게도, 한나라당에도, 우리 국민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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