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사 바람의 전설에 귀기울여볼까

<산 따라 전설 따라 바다로 간 청송, 울진 여행(6)> 불영사와 불영계곡

등록 2004.05.06 17:12수정 2004.05.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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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에 귀기울이다

문득 햇살이 그리워 차 창문을 내리니 왼쪽 뺨을 타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의 흔적이 등줄기를 따라 가슴 속으로 서늘하게 스며든다.


마치 고양이 수염을 만지는 것 같은 간질간질한 이 느낌, 혹 몇 천 겁 동안 나와 인연 있었던 한 영혼이 이 순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아무도 모르는 전설을 속삭여주고 있지 않을까? 혹시나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차 안의 음악소리를 끄고 가만히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a 선유정에서 바라다본 불영계곡 모습(1)

선유정에서 바라다본 불영계곡 모습(1) ⓒ 김정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도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어느새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 일컫는 불영계곡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절벽은 온갖 바람에 풍화되어 기괴한 모습으로 맑은 물과 어우러져 태극처럼 휘돌아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이러한 형태를 감입사행(嵌入蛇行)이라고도 한단다. 평야지대를 자유롭게 흐르던 하천이 지반의 융기에 의하여 침식작용이 부활해서, 마치 뱀이 지나가듯 깊이 패인 곳으로 곡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망이 좋은 곳에 2층 팔각정인 선유정과 불영정이 있어, 잠시 쉬면서 계곡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a 계곡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어르신의 뒷모습, 문득 오랜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소나무같아 보였다

계곡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어르신의 뒷모습, 문득 오랜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소나무같아 보였다 ⓒ 김정은

잠시 쉬어갈 겸 자동차를 멈추고 선유정에 오르니 어르신 한 분이 계곡 너머를 응시하고 계셨다.


문득 그 어르신의 뒷모습이 오랜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소나무 같아 보였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데 내 뒷모습은 언제쯤 되야 저렇게 그윽해질 수 있을까?

어르신의 모습을 닮고 싶어 계곡을 바라보는 순간, 단말마와 같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산도 깊고, 계곡도 깊고, 물도 깊고, 사람의 마음도, 한없이 깊어 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불영지에서 부처의 모습을 찾아 헤매다


a 불영사 가는 길(1)

불영사 가는 길(1) ⓒ 김정은

불영사 입구에서 들어가면 우선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란 전나무 숲이 객을 반긴다.

a 불영사 가는 길(2)

불영사 가는 길(2) ⓒ 김정은

전나무숲을 지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면 양성당 선사(養性堂 禪師)의 부도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폐서인 생활을 하던 인현왕후 민씨가 마침내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그릇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한 백발노승이 나타나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이라면서 '3일만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자,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3일을 더 기다리자 과연 다시 복권되었다.

그 후 꿈 속의 노승을 찾으니, 1516년(중종 11)에 돌아가신 양성법사의 화상과 같기에 불영사를 중심으로 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산과 전답을 불영사에 시주하였다 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인현왕후 상량비 원문의 발견으로 전설에서 실화로 밝혀졌다니 놀라울 뿐이다.

정말 간절히 원하고 기원하면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 사연이 아닌가?

부도탑을 지나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있는 곳을 지나면 불영사의 경내와 함께 전설 속의 연못이 보인다.

기이한 인연인지 모르지만 불영사 창건 설화에도 영주 부석사 창건 설화에 나온 선묘룡이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때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대사가 화엄법회를 열고 한참 교화에 힘쓸 때였다. 어느 날 노인 한 사람이 8명의 동자를 데리고 의상대사를 찾아와 자기들은 동해를 수호하는 호법신장인데 이제 인연이 다하여 이곳을 떠나면서 우리가 살아온 곳에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동안 인연 닿는 스님을 못 만나다 이제야 만나게 되니, 그곳에 도량을 세워줄 것을 간청하였다.

며칠 후 의상대사는 노인의 부탁대로 동해안의 불사 인연지를 찾아 나섰다. 포항에 도착하여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는데 울진포 앞바다에 이르자 당나라에서부터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용이 되어 쫓아와 부석사를 세운 주인공 선묘룡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반갑게 맞아 불사 인연지까지 길을 안내하였다. 그러다 문득 천축산 입구에 이르자 "손수 인연지를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a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는 불영지, 아쉽게도 부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는 불영지, 아쉽게도 부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 김정은

8일간 혼자 천축산을 돌아보며 절터를 찾던 의상대사는 피로에 지쳐 어느 연못가에 쉬고 있었는데 우연히 연못 쪽을 바라보니 연못 위에 부처님의 형상이 비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화엄경을 독송하니 지난번 그를 찾아왔던 호법신장이라 칭한 노인과 동자 8명이 연못 속에서 올라와 열심히 설법을 들은 후 의상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용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천축산에 계실 당시의 형상과 똑같으며 연못에 비친 부처님 영상은 천축산서 설법하시던 부처님 모습입니다. 주위 환경은 영산회상이 응화된 것이지요."

의상대사는 용들이 살던 연못을 메워 금당을 짓고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불영사라 명하고,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에는 무영탑을 조성했다.

불영사 연못에서 나 또한 부처의 모습을 보려 했으나 햇살이 뜨거운 탓인지, 아니면 지켜보고 있는 나 자신의 심성이 맑지 않아서인지 부처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문득 부끄러운 생각에 헛기침을 하고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자니 마치 내가 이솝우화에서 포도를 먹지 못해 포도 탓을 한 여우 꼴이 된 것 같다.

화재를 막고자 한 돌거북

a 불영사 대웅보전과 무영탑

불영사 대웅보전과 무영탑 ⓒ 김정은

부처님 영상이 비친 곳에 세워졌다는 무영탑 뒤에는 대웅보전이 세워져 있고 그 축대 밑에 이상한 돌거북 머리 2개가 특이하게 묻혀있었다. 문득 미황사 주춧돌에 새겨진 바다물고기들을 떠올리며 그 사연을 물어보니 추측대로 화산기미가 보이는 이곳에 바다의 거북으로 하여금 화재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것이란다. 그러고 보니 미황사나 성류굴은 물론이고 이곳에서도 불교 포교 당시 토착 신앙과 자연스럽게 접목된 한국 불교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a 대웅보전 축대 밑 돌거북

대웅보전 축대 밑 돌거북 ⓒ 김정은

대웅보전 내부를 들어가니 맨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불상이 아니라 천장이었다.

a 불상 뒤의 영산회상도

불상 뒤의 영산회상도 ⓒ 김정은

목재 하나 하나를 정교하게 다듬어 솜씨 좋게 조각조각 끼워 맞춘 그 섬세함과 약간 바랜 듯하면서 고색 창연하고 우아한 색깔을 잃지 않은 단청이 뿜어내는 오묘함은 요즘의 천박한 쇠광택 나는 단청과 달리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이라면 석가모니의 영산회를 구현한 사찰답게 불상 뒤에는 보통 벽면이 아닌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었다.

a 불영사 내부, 우아한 색깔의 단청이 아름답다.

불영사 내부, 우아한 색깔의 단청이 아름답다. ⓒ 김정은

범종각 맞은편에 응진전이 보인다. 누구나 그곳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그 원이 이루어진다는 영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 응진전에 들어가 기원해야겠다. 부디 속세에 찌든 때를 벗겨주어 불영지의 부처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십사 하고….

응진전에서의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불영지에서 부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비록 부처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길….

바람이 불 것 같다. 되돌아가는 길에는 바람의 소리라도 들을 수 있게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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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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