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한줌 아쉬운 봄 장마에 고사리 널기

고사리 꺼내 덕석 깔고 온종일 비벼주다

등록 2004.05.09 10:25수정 2004.05.0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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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널기
고사리 널기김규환

아침엔 날이 무척이나 화창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 다시 고사리를 꺾으러 집을 나서기 전에 어제 삶아 널었던 고사리를 마루에 갖다 널라고 하셨다. 잠시라도 바깥바람을 쐬어야 썩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나는 개교기념일 다음날인 토요일이라 선생님들이 광주에 있는 댁으로 가시려고 하루 더 쉬게 해준 덕분에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 집에 남아 고사리를 말려야 한다. 웬만하면 산에 따라 나서는 게 훨씬 재미있고 편하지만 전날 꺾어온 고사리 양이 지금껏 본 것 중에서 최고로 많아 나라도 마루 밑에 둘둘 말려 있는 덕석을 또르르 굴려 펴서 해가 반짝할 때 말려야 한다.

고사리는 삶아서 널어도 금세 눅눅해져 흐물흐물 해졌다가 지네들끼리 엉겨붙은 곳은 쉬 썩고 만다. 봄 장마는 비가 많이 와서 문제가 아니라 한번 왔다하면 사나흘을 쉬지 않고 내리는 터에 방에서 널어 말리는 건 한계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가 서너 평쯤 되는 큰 덕석을 혼자서 들기는 쉽지 않았다. 끙끙 젖 먹던 힘까지 쏟아 한쪽 끝을 잡고 질질 끌고 나와 낮은 마당에 툭 내려 고루 폈다. 네 귀퉁이를 돌아가며 잡아 발로 툭툭 차 보았지만 덕석을 이길 수 없는 작은 체구라 대빗자루로 쓸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멍석이 우리지역에서는 덕석이었습니다.
멍석이 우리지역에서는 덕석이었습니다.김규환
이윽고 방으로 들어가 소쿠리에 가득 담아내기를 일곱 번을 반복했다. 어제 남은 고사리국에 아침을 먹고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오전에 힘을 몇 번 쓰고 나니 혼자 남은 내가 밉기까지 하다. 차라리 우겨서라도 산에 따라 간다고 할걸 그랬나보다.

다 내온 다음 두 줌 정도 되는 고사리를 멍석 바닥을 빨래판 삼아 둘둘 비벼준다. 대여섯 번 비비고 휙 던진다. 고사리 손으로 일을 하니 더디기만 하다. 겹치지 않게 고루 펴 널기를 한 시간 여 지속했다.


허리도 아파 오고 재미도 없고 지칠 만도 했다. 덕석 위에는 까무잡잡한 것과 푸르스름한 지렁이 모양의 고사리가 좌악 깔려있다. 겹치지 않도록 빈틈없이 널었지만 멍석 하나로는 턱없었다. 함석이라도 하나 있으면 고사리 말리기 쉬웠지만 그 마저 없어 큰댁에 가서 덕석을 가져와야 한다.

밤새 방에 군불 때고 널어도 이보다 더 낫지 않았습니다.
밤새 방에 군불 때고 널어도 이보다 더 낫지 않았습니다.김규환



"할매!"
"누구냐?"
"예. 저라우."
"누구?"
"규환이랑께요."
"워째서?"
"덕석 좀 가지로 왔어라우. 고사리 널 데가 부족헝께요."
"갖다 써라."

큰 집 것은 약간 작았지만 최근에 잘 쓰지 않고 걸어 놓아 훨씬 가벼웠다. 사립문을 통과하여 나오는 담벼락이 왜 그리 길었던지. 앓다시피 허리가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오지만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구 달렸다.

거의 덕석과 함께 마당에 고꾸라져 엎드린 채로 한동안을 쉬었다. 간신히 기운을 차려 먼저 깔아 놓은 것과 나란히 폈다. 수북히 쌓인 나머지를 고루 펴 널었다.

일단 다 해놓았다고 맘 푹 놓고 밖에 나가 놀지를 못한다. 그곳에 긴 대막대기를 하나 손에 쥐고 있다가 어미 닭과 중병아리가 휘저어놓고 닭똥을 찍찍 깔겨대는 일을 막아야하고 행여 고사리인 줄 알고 하나씩 물고 유유히 사라지는 걸 방지해야 한다.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보았다. 일을 마치고 한 시간여 지났을까 몰라보게 줄기가 가늘어져 간다. 조그만 더 햇살이 내리쬐면 오후 서너 시쯤엔 바삭바삭 꼬들꼬들 마르겠지만 높게 떠 덩치가 무척이나 큰 흰구름이 세월 모르고 마을을 감싸 어슬렁거리는 통에 널어 말린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마당으로 내려가서 다시 비벼주고 널어주는 수밖에 없다. 고사리 잎도 떼어내고 오가며 집에 들를 때마다 비벼줘야 고사리가 부드럽고 말라서도 부러지질 않는다. 몇 번 비벼주니 이젠 고사리밥이 쉬 떨어진다.

얼마 지나면 해가 내리쬐겠지. 부엌으로 가서 물동이에 담긴 물을 한바가지 떠먹고는 졸음이 몰려와 마루에 홑이불을 꺼내와 배를 깔고 엎드려 마당을 내려다봤다. 잠시 눈을 감고 경계를 게을리 한 사이 한 무리의 닭이 몰려들었다.

"워-"
"쉬-"

장대가 그에 미치지 못하니 마루에 대고 "통통" 소리가 나도록 두들겨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잡고 있던 *간지대를 휙 던져버렸다. 순간 한 마리가 *어깨쭉지에 맞자 놀란 *닭구새끼들이 한꺼번에 뒤뜰로 사라졌다. 한가지만 생각할 줄 아는 닭이 또 귀찮게 몰려오리라.

잘 말라야 될 텐데
잘 말라야 될 텐데김규환
하루만 바짝 햇살이 내리쬐면 말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닌데 해는 숨어 다시 기어 나오기는 틀렸는가 보다. 이른봄에는 가물어 샘물마저 길어다 먹기 힘들더니 얼마 전부터는 봄 장마가 시작된 듯 하였다. 보리도 자랄 만큼 자라고 대마 삼도 키가 웃자라 저러다 쓰러질지 모르는 날이 이어졌다.

오늘 하루 날씨가 무척 좋다싶어 마당에 널어보지만 이건 점심을 지나자 아예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를 어쩐다지. 물 한 모금, 햇살 한 줌이 아쉬운 판에 간절한 사람 맘 몰라주는 게 자연인가. 원망스럽다.

그래도 바깥바람이라도 쐬라고 안으로 들여가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오후 2시 무렵 산에 가셨던 어머니께서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오셨다. 망태기에 가득 채우지 못했는데도 걱정이 되어서 돌아오신 모양이다.

"엄마 글렀는갑소."
"글게 말이다. 안되겠다. 후딱 들여가자꾸나. 이러다 비가 또 몰려올지도 몰라."
"알겠어라우."

뭐든 햇볕이 말리는데는 최고다. 그 다음 방법은 밀가루로 비벼주는 것인데 수제비, 국수 만들어 먹기도 힘든 시절 사람 입에 풀칠하기도 아쉬운 판에 그리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방에 군불을 마구 때는 것이고 최후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도 기다리고 있다.

부엌에서 고사리를 삶고 또 군불 때고 여름에도 그랬던 날이 이어졌답니다.
부엌에서 고사리를 삶고 또 군불 때고 여름에도 그랬던 날이 이어졌답니다.김규환
최악의 방법이란 재를 활용하는 것이다. 부엌에 다 타고남은 식은 재를 짚으로 만든 삼태기에 가득 가져와 함께 둘둘 비빈다. 어떻게든 수분을 제거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고사리에 재가 풀풀 날리도록 끼얹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도 모자라 비벼준다니!

어른들은 급해도 절대 시장에서 고사리를 사다 먹지 않으셨다. 또한 생산과정이 투명하지 않는 고사리는 먹지 말라고도 하셨다. 고사리가 독성이 강한 나물이긴 하지만 삶아서 잘 말리면 신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너도나도 가욋돈 마련에 혈안이 되었던 그 때는 건조기가 없던 지라 재를 섞든 뭐를 섞든 상관이 없었다. 결국 우리 집에서도 그리 했으니까.

그런 고사리는 급기야 고사리 줄기 사이사이로 재와 흙이 침투하여 고사리 반, 재 반이 되어 꼬들꼬들 말라도 겉이 희뿌연 색이 되고 마니 그걸 먹게되니 사람들은 "고사리 많이 먹으면 암이 걸린다"고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저울로 떠보면 무게는 훨씬 많이 나갔던 기억이 있다.

하여튼 그 많은 분량을 방으로 가져갔다. 어머니께서 펴서 너는 동안 나는 방에 불을 또 땠다. 이래저래 오늘도 시원한 방에서 자기는 글렀는가보다. 안방은 지린내 나는 누에똥 냄새에 절었고 건넌방, 아랫방은 고사리와의 동침을 하루 이틀 했던가. 해질 무렵부터 시작하여 사흘 동안 비가 또 내렸다.

어느 정도 말라가는 고사리
어느 정도 말라가는 고사리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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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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