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47

술 취한 세상

등록 2004.05.13 17:43수정 2004.05.1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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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받으시고 좀 잠자코 계시면 아니 되겠소?"

모영하가 궤짝에서 꺼내어 건네 준 것은 엽전 꾸러미였다. 백위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모영하의 손을 뿌리쳐 엽전 꾸러미를 떨궈 버리고서는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포교를 매수하려 듦이냐! 당장 배를 멈춰 세곡을 건지지 않으면 이 죄까지 물은 진즉 어서 내 말을 시행하거라!"

모영하는 새파랗게 낯이 질린 채 백위길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선실 밖으로 나가 선단을 뒤로 돌릴 것을 명했다.

"어떻게 건지기야 하겠지만 실을 곳이 없소이다."

모영하의 말에 백위길은 크게 화를 내며 그를 다그쳤다.

"이미 한양이 지척에 있는데 사람을 내리게 해서라도 실어야 할 것이지 않소! 당신이 맡은 바는 어디까지나 세곡을 안전히 운송하는 것이오! 잊지 마시오!"


모영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서다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백위길에게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한 가지 방도가 있사옵니다. 인근 관아에 가서 수레와 사람을 빌어 실어 가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미천한 제가 가서 청하는 것보다는 포교께서 가 청하는 것이 말이 잘 통할 듯 합니다."


백위길은 그 말도 옳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모영하에게 다짐을 받아두었다.

"행여 나를 떼어 놓고 갈 작정이라면 그럴 생각도 하지 마시오. 그랬다가는 꼭 크게 죄를 물을 것이오."

"에구! 이르다 마다겠사옵니까!"

모영하는 정색을 하며 슬슬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멀리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혜천 스님은 뭔가 못 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백위길은 재빨리 갔다올 요량으로 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서둘러 사잇길로 들어갔다. 얼마가지 않아 백위길은 뒤에서 서너명의 사내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을 뒤따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곡선에서 나온 이들이라 여긴 백위길은 뒤돌아 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냐?"

백위길이 자세히 보니 사내들의 손에는 몽둥이와 짧은 칼이 들려있었다.

"죽더라도 우리를 원망 마시오."

"뭐라! 네 이놈들! 감히 포교를 해하겠다는 것이냐!"

백위길은 지지 않겠다는 듯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막상 그의 손에는 그럴듯한 무기조차 없었다. 급한 대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드려 했으나 사내 하나가 그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크!"

백위길은 성급하게 달려드는 사내의 몽둥이를 피하며 잽싸게 정강이를 걷어차 버리고선 죽을힘을 다해 뛰어 나갔다. 사내들도 백위길을 놓칠 경우 자신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이를 뒤쫓았다.

'아차! 낭패구나!'

처음 가는 곳이라 지리를 알지 못해 무작정 나무 사이로 뛰어 내려 간 것이 화근이었다. 백위길의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마주서 있었다.

"거, 그놈 어차피 이리될 거 조용히 잡혀 주면 안 되나?"

네명의 사내들이 숨을 헐떡이며 백위길을 둘러쌌고 백위길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앞장 선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우욱!"

순식간에 배를 얻어맞은 사내가 땅바닥에 나뒹굴었으나 다음이 문제였다. 몽둥이 하나가 사정없이 백위길의 뒤통수에 내려꽂히고 만 것이었다. 백위길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다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다른 사내가 백위길의 등에 확인이라도 하듯 몽둥이를 적중시켰고 칼을 든 사내가 눈에 살기를 머금은 채 성큼성큼 다가섰다.

"네 이놈들 멈추지 못하겠느냐!"

갑자기 나무사이에서 큰 소리와 함께 절뚝거리며 달려오는 사내가 있었다. 백위길은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도 그 사내가 혜천 스님과 같이 다니는 끔적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놈은 뭐야?"

"할 수 없지. 저 놈도 일단 해치워 버리자구."

사내들은 서 있을 힘도 없어 아예 땅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백위길을 놔두고서는 끔적이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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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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