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밤마다 불침번을 서는 이유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14) 상추와 달팽이

등록 2004.05.13 19:33수정 2004.05.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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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짐 정리와 집안 청소 그리고 이사에 따른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도 며칠이 걸리더군요. 이사 당일 연결해 준다던 ADSL 인터넷 연결이 통신 회사의 업무 착오로 두번이나 미루어지더니 3일 전에 드디어 연결이 되었습니다.


a 내가 일일이 한 뿌리씩 옮겨심은 파 모종.

내가 일일이 한 뿌리씩 옮겨심은 파 모종. ⓒ 정철용

이제 모든 것이 안정이 된 듯하여 아내와 나는 화원에서 채소 모종들을 사서 화단의 비어 있는 땅에 심었습니다. 잎사귀가 제법 자란 어린 상추들은 아내가 옮겨 심고, 앙증맞게 생긴 잎사귀가 귀여운 당근들과 여릿여릿한 초록 줄기가 싱그러운 어린 파들은 내가 옮겨 심었습니다.

어린 모종들을 일일이 하나씩 땅에 옮겨 심는 일은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힘이 드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심어 놓고 한두 달 후면 맛있는 상추쌈을 먹을 수 있고 아주 싱싱한 당근을 아침 식탁에 올릴 수 있으며, 된장찌개에 넣을 파를 슈퍼마켓에서 살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a 아내가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심어 놓은 상추 모종들

아내가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심어 놓은 상추 모종들 ⓒ 정철용

특히 상추를 너무나 좋아해서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아내는 자신이 심은 어린 상추들 앞에서 마치 자식에게 말하듯이 "잘 자라야 한다. 얘들아!"하고 덕담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딸아이를 통학시키고 돌아와 보니 아내는 몹시 화가 난 듯 원통한 표정이더군요. 어린 채소들에게 물을 주려고 마당으로 나갔다가 밤사이 달팽이가 어린 상추잎을 갉아 먹은 흔적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가서 살펴 보니 정말 상추 모종 하나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몇몇 상추 모종은 줄기에 붙은 잎사귀가 제법 많이 상해 있더군요.

달팽이는 별로 먹을 것 없는 당근과 파의 잎사귀는 건드리지도 않고 유독 상추잎만 갉아 먹었더군요. 속이 상한 아내는 당장 달팽이를 죽이는 약을 사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이러다가 저 어린 상추들이 모두 달팽이밥이 될 거라면서 말입니다.


a 밤만 되면 기어나와서 상추잎을 갉아 먹는 달팽이.

밤만 되면 기어나와서 상추잎을 갉아 먹는 달팽이. ⓒ 정철용

그러나 아무리 미물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그것도 우리가 먹을 채소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상추를 좋아하듯이 달팽이들도 상추를 좋아한다면, 그들도 상추를 먹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문제는 달팽이는 사람처럼 상추를 잘 키워서 계속해서 잎사귀를 따 먹는 그런 지혜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달팽이를 죽이는 것은 싫어서 나는 아내를 설득한 후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습니다. 그 방법이란 밤마다 불침번(?)을 서는 것이었습니다.


달팽이는 어두워지면 기어 나오는 야행성 동물이라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마당에 나가 달팽이를 잡기로 한 것이지요. 저녁 먹고 한 차례 그리고 잠자기 전에 또 한 차례, 이렇게 두번을 나가서 살펴보니 달팽이가 너무나 많더군요.

전에 살던 집의 채마밭에는 이상스럽게도 달팽이가 거의 없었는데, 새로 이사 온 이 집에는 달팽이가 어찌나 많은지 징그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거의 다 자라서 엄지발가락 발톱만한 놈에서부터 손으로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아기 달팽이에 이르기까지, 한번 불침번을 설 때마다 빈 모종 화분에 잡아 넣은 달팽이들이 수십 마리에 이르더군요.

그렇게 잡은 달팽이들을 채소를 심은 화단에서 아주 멀찍이 떨어진 앞쪽 정원에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그 쪽은 마음대로 다니면서 먹어도 되는 풀잎들과 꽃나무들이 있고, 또 채소를 심은 뒤쪽 화단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달팽이가 여행하기에는 며칠이 걸릴 장거리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자고 나서 아침에 살펴보면 작은 구멍이 뚫려 있거나 한쪽이 사라진 상추 잎사귀들이 발견되곤 했습니다. 참다못한 아내는 다시 달팽이 죽이는 약 타령을 했지만 내가 한사코 반대하니까, 다른 묘안을 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빈터에 상추 모종들을 더 사와서 물량 공세로 나가자는 것이었지요. 달팽이들이 그 많은 상추잎을 다 갉아먹을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이지요.

아내 말도 일리가 있을 듯하여 오늘 낮에 우리는 다시 화원에 들러 상추 모종 화분 3개를 샀습니다. 아내는 공들여 상추 모종들을 옮겨 심고는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많이 심어 놨으니, 달팽이놈들, 네놈들이 아무리 먹어치운다 해도 이중에 반은 쑥쑥 잘 자라날 거야.'

내게는 그 미소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a 오늘 저녁 내가 불침번 서며 잡은 달팽이들.

오늘 저녁 내가 불침번 서며 잡은 달팽이들. ⓒ 정철용

오늘 밤에도 나는 저녁을 먹은 후 한차례 불침번을 서고 들어왔습니다. 낮에는 한마리도 보이지 않다가도 밤만 되면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 오늘도 30분간을 손전등을 비춰가며 달팽이들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잡은 달팽이들을 앞쪽 정원에 풀어주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제 상추를 심은 뒤쪽 화단에는 얼씬도 하지 마렴. 우리 마나님 잘못 건드리면 정말 너희들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단 말이야. 내 말 알겠니?'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대꾸도 않고 달팽이들은 느릿느릿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상추가 쑥쑥 자라나서 제법 잎사귀들이 풍성해지면 몇 장 뜯어다가 달팽이들 몫으로 앞쪽 정원에 갖다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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