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순례단, 오월 광주에 가다

5·18민주화항쟁 현장 순례기

등록 2004.05.18 04:22수정 2004.05.2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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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신묘의 모습 ⓒ 안창규


광주순례단 좌충우돌 광주를 가다

다시 오월이 찾아왔습니다. 오월은 참 많은 수식어들이 생각나는 달이죠. 노동자의 날, 가정의 달,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달, 그리고 광주.

이 수식어들 중에 가장 무게 있게 다가오는 단어는 광주입니다. 처음 광주를 찾았던 건 막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을 했을 때, 그때가 광주민주화 항쟁 20주년이었던 2000년 5월이었습니다. 혼자서 배낭을 메고 찾아 나섰던 광주.

당시만 해도 광주는 나에게 있어서 미지의 땅이었죠. 단지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은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학살이 자행된 아픔의 도시라는 단편적인 지식이 다였습니다.

처음 망월동에 찾았을 때, 윤상원 열사의 묘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중년의 남녀 분들의 모습을 보고 무엇인가 뜨거운 것들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첫 번째 광주기행은 광주가 단순히 아픔만을 지닌 도시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배우고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남도지방을 여행하면 꼭 마지막으로 광주를 거쳐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매번 광주를 찾을 때면 항상 새로운 광주를 만났습니다. 조금은 투박해 보이지만 항상 따뜻한 광주 분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한동안 활기에 찬 생활을 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2000년 이후 4번을 찾아갔던 광주를 2년 동안 찾아가지 못했죠. 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은 광주를 잠시 잊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귀국을 하고 다시 복학생이 된 나는 며칠 전 후배들이 광주를 내려간다는 말에 다시 광주를 떠올릴 수 있었죠. 항상 혼자 간 광주였지만 이번에는 후배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업이 늦게까지 있어서 함께 출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출발 이틀 전 고심 끝에 수업이 늦게까지 있던 후배 2명과 팀을 구성했습니다. 원래 일정은 금요일(14일) 오후 7시에 출발해서 토요일 오후 5시에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광주까지 가는 김에 일요일까지 일정을 잡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비용이었는데 졸업한 동기들에게 광주순례에 대한 취지를 설명했더니 조금씩 비용을 보내주었습니다. 모두들 힘든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주어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죠. 이제 주머니도 넉넉해지고 어설픈 자료집을 만들고 금요일 수업이 끝난 후 밤 10시 30분에 집결한 우리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개성이 강한 세 명이 모여 떠나는 2박3일의 광주민주화항쟁 순례는 이렇게 시작되었죠. 항상 '즐겁게 놀자'를 주창하는 우리의 학회장 정군 '정지희', 어리버리 신비외계소녀 '진업이', 그리고 미친곰 나. 세 명이서 떠나는 우리 광주 순례단의 명칭은 '좌충우돌 순례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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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 ⓒ 안창규


@ADTOP@
좌충우돌 순례단 첫날 비를 만나다

광주에 도착했던 시간은 15일 토요일 새벽 4시 30분.

처음 광주에 온 정군은 왠지 흥분된 상태였고 광주가 고향인 진업이는 새로운 광주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들떠 있었습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 나는 그동안 광주항쟁의 의미에 대해서 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주고속버스터미널 바닥에 앉아 지도를 펴놓고 광주순례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을 세웠죠. 조선대에서 하루를 보낸 본대에 합류하기 전에 잠시 터미널 근처에 있는 5·18기념공원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터미널에서 나오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10분 정도 걸었을까. 제법 빗줄기는 굵어졌고 첫걸음부터 비가 오기에 일행들은 순례단 이름에 반발을 해봅니다. '좌충우돌 순례단',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건 사실이죠.

비를 주룩주룩 맞고 5·18기념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민군으로 보이는 조형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부상을 입은 한 사람을 부축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연출한 조형물이었죠. 조형물을 보며 당시 광주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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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항쟁 기념 동상 ⓒ 안창규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조형물에 나타난 모습에서는 아픔을 딛고 서로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지난날 광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5·18기념공원을 둘러보고 지하철로 본대가 있는 조선대로 이동하였습니다. 개통한 지 한 달밖에 안된 광주지하철의 쾌적함에 잠시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서울과는 달리 표가 플라스틱 칩으로 되어 있어서 혼란스러워하는 진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사람들이 표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개찰구에서 역무원 아저씨들이 마이크로 표사용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인상에 남더군요.

조선대에 도착하였을 때 빗방울은 더욱 더 굵어져 있었죠. 본관에 있는 본대를 만나기 위해 조선대를 가로질러 갔습니다. 넓은 조선대를 걷는 동안 우리 일행은 온통 비에 젖어 도착했을 당시에는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죠.

수건으로 젖은 몸을 대충 말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버스에 올랐습니다. 모두들 전날 밤을 새웠는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하는 친구들이 많더군요.

전남대로 이동해 80년 5월 광주민주화 항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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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를 맡아 주신 자유인 광주 오월의 빛 소속 윤철권씨 ⓒ 안창규

모두들 피곤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이날 가이드를 맡아주셨던 광주 오월의 빛 소속 윤철권씨의 힘있는 목소리에 다들 관심 있게 경청했습니다.

전남대를 시작으로 전남도청 주위를 답사하고 광주 외곽지역에서 학살이 자행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인 주남마을, 목포로 빠져나가는 광목간 양민학살지, 그리고 당시 영창이 있던 상무대 옛터에 잠시 멈추어 서서 그날의 자취와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특히 상무대 옛터에서의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죠.

영창 안에 들어서서 가이드 윤철권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공포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잡혀온 분들은 이곳에서 모진 고문들을 받았다고 합니다. 24시간 무릎을 꿇고 6개월 이상 생활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구타에 강도 높은 군대식 기합,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으며 좁은 감옥 안에서 몇백 명이 6개월 이상을 지냈다는 사실. 그 당시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만행이었는지 상무대 영창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날 영창에서 가이드를 맡은 윤철권씨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나의 꿈은 넓은 잔디가 깔린 정원이 있는 넓은 집에서, 파라솔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게 나의 꿈입니다."

덧붙여서 광주정신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셨죠.

"상무대 영창에서 볼 수 있듯이 적국의 포로도 아닌데 자국의 국민을 좁은 영창에다 가두고 학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 우리가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해야 하는지 분명 이것은 오월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오월정신의 하나는 인권존중이다. 여기서 고문 받고 고문했던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미래를 참혹하게 빼앗겨 버렸다. 여기서 일어났던 만행은 한 세대의 단절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가정생활을 파탄내고 때로는 이곳에서 고문했던 사람들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내가 조금 더 잘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는가!"



윤철권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정말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라크 파병에 있어서 파병을 주장하시는 분들에게 다시 묻고 싶은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전남대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우리 일행은 망월동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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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사람들 ⓒ 안창규


망월동에서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죠. 무덤과 무덤 사이마다 가슴 아픈 사연들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계엄군이 정조준 사격해서 죽음을 당했던 최미애씨, 시신을 찾지 못해서 가묘를 만들었던 김남석씨 사연도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가묘 대각선으로 2m 뒤에 무명열사 묘가 있는데 작년 아르헨티나 발굴단이 와서 김남석씨 시신을 무명열사 묘에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김남석씨 어머니는 울면서 "아들아! 미안하다"라고 하며 졸도했다고 하는데, 매년 김남석씨 가묘 앞에서 아들을 못 찾아 안타까워하던 김남석씨 어머니는 불과 20m 뒤에 있는 진짜 아들 시신을 못 찾아 2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모두들 사연 하나 하나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신묘로 옮겨 사진전시실로 들어갔습니다. 사진과 함께 당시 상황을 윤철권씨의 설명을 들으며 80년 광주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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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구묘에서 참배하고 있는 학생들 ⓒ 안창규

전시관의 사진들은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순차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죠. 광주민주화 항쟁이 시작되면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불법 연행, 시민들이 광주시내로 나와 싸우는 모습들, 그리고 해방광주, 공수부대의 재진입. 사진을 보면서 다시 내게 물었습니다.

광주에 오면 항상 자신에게 묻는 건 과연 내가 그 당시 광주에 있었다면 총을 집었을까, 아니면 카메라를 들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종군기자가 꿈인 나에게 있어서는 항상 고민이 되는 질문입니다. 얼마 전 광주의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던 독일인 저널리스트 위르겐 힌츠페터씨가 지난 4일 심장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히길 희망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광주에 남아서 광주를 카메라에 담고 세계에 광주를 알렸던 그가 어쩌면 죽고 나서 광주에 묻히길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이드를 맡은 윤철권씨가 한 장의 사진 앞에 섰습니다.

'전두환 때려죽이자'라고 쓰여 있는 피켓을 들고 웃으며 걸어가는 여자 분의 사진이었습니다. 윤철권씨가 사진 앞에서 광주는 아픔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여자 분의 사진은 해방광주 때 사진인데 한마디로 해방광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정한 인간의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경찰도 필요 없고 모자라면 나눠먹는 그런 세상. 해방광주는 미래의 인간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범이 되는 슬픔이 아닌 희망을 말하는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카메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한 장의 사진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지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아픈 기억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것. 만약 총이 아닌 카메라를 잡는다면 내 카메라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카메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망월동의 참배로 본대의 일정은 끝났습니다. 비가 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직접 보지 못했죠. 그래서 본대 버스에 오르지 않고 우리 좌충우돌 순례단 세 명은 하루 더 광주에서 보내기로 했죠. 본대 버스를 떠나보내고 잠시 이날 가이드를 해준 윤철권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자기를 자유인이라고 소개한 윤철권씨의 해맑은 웃음이 생각이 납니다.

헤어질 때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망월동을 나섰습니다. 그날 밤 양동시장에서 저녁을 국밥과 막걸리 한 잔으로 해결하고, 친절하게도 국밥집 아주머니가 숙소를 할만한 여관을 안내해주셔서 기분 좋게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올 때마다 광주 분들은 참 따뜻하다는 걸 느끼며 하루를 정리했습니다.

광주, 희망을 말하다

16일 양동시장 여관에서 아침 10시쯤 나와 광주항쟁의 중심지인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도청으로 가는 길에 광주항쟁 유적지들을 찾아다녔죠. 지도를 보면서 직접 유적지를 찾아 나서는 것도 광주항쟁을 이해하는 방법 중에 하나라는 생각에 다리 품을 팔기로 했습니다.

처음 찾아낸 곳은 광주에 관한 비디오를 보면 복면을 한 시민군이 칼빈총을 메고 트럭을 타고 출발하는 장면이 있는데 꼭 비디오에 나오는 그 장면과 유사한 배경의 장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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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항쟁 당시의 적십자 병원. 이후 녹십자병원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서남대 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 안창규

지도에는 광주공원광장-시민군 편성지로 적혀 있었죠. 그곳에서 아침밥을 먹고 다시 발길을 옮겼습니다. 도청으로 가는 표지판을 따라 다리를 하나 건넜는데 작은 병원이 눈에 보이더군요.

지도상으로는 적십자 병원 자리인데 지금은 서남대학교 병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 적십자 병원 흔적이 남아 있더군요. 병원 왼쪽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앞쪽에는 녹십자 병원이라고 적혀 있었고 표지판 뒤에는 '광주 ○십자 병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자세히 보면 '적'자가 지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대략 800m 정도 걸어올라 가니 어제 잠시 둘러본 전남도청이 보이더군요.

아직도 예전 모습을 하고 있는 도청을 둘러보았습니다. 혹시 그때의 총탄 자국이라도 있을까 하고 유심히 쳐다보았지만 그런 흔적들은 남아있지 않더군요.

하지만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교 학생이 선물 받은 주머니칼로 도청 벽에 '어머니'를 새기는 장면, 전날 도청 앞 YWCA에서는 300여 명의 학생과 여자들이 최후까지 남아 있겠다며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항쟁부의 실질적 지도자인 윤상원씨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돌아가 달라고 호소하자 학생들은 형들과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며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때 윤상원씨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오늘은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 어린 너희들이 살아남아서 우리가 역사의 승리자였다는 걸 알려 달라"며 학생들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도청과 YWCA에 남아 끝까지 공수부대와 싸움을 합니다.

최후항전 때 희생당한 분들은 도청 앞 상무관(당시 경찰들이 체육관으로 사용했던 장소, 아직도 경찰이 체육관으로 사용하고 있음)에서 잠시 방치하다가 쓰레기차에 실어서 내버린 곳이 지금에 망월동이죠. 나중에 광주시민들이 시신을 내버린 장소에 모셔두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에 망월동 국립묘지가 된 것이죠.

상무대를 둘러보고 나오다 우연히 어제 가이드를 해주신 윤철권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오늘은 서울에서 올라온 고려대 학생들을 안내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윤철권씨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난다고 하지 않았소"라며 반가움을 표시했습니다.

다시 윤철권씨와 헤어지고 5·18 당시 불탔던 전 MBC(지금은 고시원) 건물을 보고 지도상에 나와 있는 녹두서점 예전 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항상 광주에 오면 녹두서점 옛터만 찾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이날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죠.

녹두서점을 찾기 위해서 한 시간 정도 주변을 돌고 있을 때였죠.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찾아 나서고 있었는데 한 분이 오셔서 어디를 찾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녹두서점을 찾고 있다고 하니 그분께서 아신다며 안내해 주시겠다고 하더군요.

전 이 근처에서 많은 분들이 녹두서점을 찾아 주시려고 했는데 아는 분들이 없어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분께서는 녹두서점을 잘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혹시 광주항쟁 당시 참여하셨냐고 물어보았는데 '광주기동타격대'에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반가운 마음에 당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가는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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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근처 항전지 ⓒ 안창규

최후 항전 당시 도청에 남아있던 이야기며 당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 1층에 있었고 윤상원 열사는 2층에 있었으며 화염방사기에 돌아가셨다는 증언도 들일 수 있었죠.

최후항전 이후 상무대 영창에서 5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곳에 있을 때는 내가 인간이었나, 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신다고 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은 정말 역사의 승리자라고,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끝내시고 우리를 녹두서점으로 안내해주셨죠. 그분 말씀으로는 녹두서점은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까지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며 사라져 버린 녹두서점에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셨죠. 가만히 뒷모습을 쳐다보았습니다.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광주를 짊어져 온 그 어깨는 참으로 넓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시기 전 성함을 물어보았는데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광주항쟁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이더군요. 제가 만났던 분은 기동타격대를 이끌었던 나일성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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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이 광주에 남긴 메세지 ⓒ 안창규

이번 순례는 저에게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해준 좋은 기회였습니다. 80년의 광주가 단순히 아픔만을 간직한 광주가 아니었다는 것. 80년 당시에는 패배했을지 모르지만 그때 보여주었던 사람들에 뜨거웠던 마음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들을 돌아보고 어떻게 역사가 발전해 나가야 하는지 보여준 청사진이었다는 것입니다.

80년 5월의 광주는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평화와 평등, 그리고 인간존중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것인지, 당시 고립된 해방구 안에서 계층을 초월해 서로 밥을 나누고 격려하고 참혹함 안에서도 서로 웃어줄 수 있었던 오월의 광주는 분명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도 희망이란 단어를 배워 가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좌충우돌 순례단의 모든 일정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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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순례단 좌충우돌 ⓒ 안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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