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야만적' 보건의료체계, 대통령이 챙겨라

등록 2004.05.18 22:35수정 2004.05.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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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제36조3항에는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라고 되어있다. 이와 같은 헌법상의 정의는, 보건의료문제가 개별적·사적 영역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적·공공적 영역 중의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헌법상의 정의와는 전혀 딴판이다. 보건의료예산은 정부예산의 0.2%로 OECD 가입국가 중 최하위이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운영하는 공공병원은 9%밖에 안되며, 건강보험제도는 진료비의 50%를 환자본인이 직접 부담해야 하는 반쪽 제도에 불과하다.

환자들은 대부분의 정신적·경제적 부담은 본인과 그 가족들이 감당해야 한다. 국가의 보건의료에 대한 기획·집행기능은 극히 미미하며, 모든 것이 시장에 내 맡겨진 형국이다.

일반적으로 시장이 이루어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의 동등한 지위 △선택할 권리,△자유로운 참여의 보장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시장형성 원칙을 적용하여 볼 때, 보건의료는 그 특성상 시장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는 분야임이 명확하다. 우선, 소비자의 지식결여(Lack of Information)를 들 수 있다. 즉, 보건의료를 이용하는 소비자는 자신의 질병과 치료에 대해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에 제공자(의사)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건의료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공급자(의사)는 소비자(환자)에 대하여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소비자 주권(Consumer Sovereignty)이 성립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보건의료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것으로 하여 공급자의 지배적 지위는 다른 부문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

다음은 의료공급의 독점(Professional Monopoly)이다. 면허를 가진 자만 공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여타의 시장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건의료인에게 면허를 부여하는 것은 소비자 주권이 성립하지 않는 상태에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공급자의 독점상태가 발생하는 역작용도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면허를 가진 자가 아닌 법인의 형태로 대형자본이 개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점이다.

이와 같이 보건의료는 그 자체 특성으로 인하여 공급자와 소비자의 자유의사에 의한 거래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불공정한 게임, '시장의료'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장은 엄연히 존재한다. 시장이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를 지배하다시피 한다. 개별 개원의든지 대형자본이든지 시장참여자들은 그 속성상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 이윤이 남아야 살아가니까. 그런데 어떻게 시장참여자들에게 돈을 받지 말거나 적게 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나? 시장의 속성에 비추어 그렇게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상하지 않은가? 소비자는 공급자가 사라는 대로 살수밖에 없다. 이것이 시장논리의 원칙에 맞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공적 보건의료를 공고히 하는 것 일게다. 공공의료기관을 통하여 진료표준을 제시하고, 이로 하여 의료시장을 건전하게 견인하여야 한다. 그리고 공적부조기능을 충분하게 하여 사회적 안전망을 가동하여야한다. 다시 말해 공공의료기관은 의료시장에서 '보안관'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위와 같은 정신을 반영한 보건의료체계를 가동한다. 사실상 모든 국민들을 공공의료로서 보호하는 유럽국가들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는다는 미국조차도 공공병상비율이 35%이다. 일본 또한 30.7%의 병상을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운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 공공의료기관이 보건의료시장에서의 '보안관'기능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우선 절대분량에서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이 차지하는 비율은 9%. 병상수는 전체병상 대비 13%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장을 건전하게 선도하고 견제하는 기능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공공의료기관조차 수익성에 입각한 병원운영이 강요되어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도 없다.

이처럼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공급자 담합적' 시장중심의 보건의료체계와 충분하지 못한 공공의료에서 나타나는 국민적·국가적 폐해는 가히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 잘 알려진 몇 가지 문제만 살펴보자.

중병이 걸리면 집안이 망한다?

평소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들의 고통을 우선으로 꼽을 수 있다. 엄청나게 늘어난 진료비로 인하여, 그야말로 중병이라도 걸린다 치면 집안이 망할 지경이 돼 버렸다. OECD 가입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높은 본인지출률(민간보험, 본인부담)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또한, 국민들은 보건의료계 '독점 공급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2000년 의약분쟁이 단적인 예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국가는 지난해 중국에서 창궐하여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던 사스(SARS)환자를 유치할 병원이 없어 허둥지둥 쩔쩔매다가 국가 대란 사태를 맞을 뻔했다.

이같은 폐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참여정부는 공공의료 30% 확충을 공약하였다. 그리고 공공의료기관 운영 기본방향을 수익성에서 공공성으로 전환한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공약은 헛구호로 전락될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우선 정부 각 부처의 손발이 맞지 않는다. 보건복지부가 담배부담금을 재원으로 하여 공공의료 확대 강화를 표방하였지만, 재경부가 "다른 곳에도 쓸곳이 많다"며 발목을 잡는다. 보건복지부가 공공의료기관 관리부처 일원화를 위하여 지방공사의료원 보건복지부 이관을 주장하지만 행정자치부가 놓아주지 않을 태세다. 기획예산처는 예산확보의 난맥상을 주장하며 공공의료 확대·강화에 회의적이다.

또한 중앙정부정책과 지방자치단체의 '엇 박자'도 발생하고 있다. 주민들이 발의하여 상정된 '경기도 성남시 지방공사의료원 설치조례'가 성남시의회에서 심의 연기되어 좌절될 위기에 처해 있다. 공공의료 30% 확충이 중앙정부의 방침인데도 말이다. 중앙정부가 지방공사의료원 지역거점병원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마산, 군산의료원은 아직까지 민간위탁경영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전라북도는 한술 더 떠 군산의료원 매각까지 검토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릉, 진주의료원은 일반진료기능을 포기하고, 노인요양소로 전환할 것을 강원도와 경상남도로부터 끊임없이 강요받고 있다.

지금의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참여정부의 공약이 아무런 결실 없는 공약(空約)으로 전락될 판이다. 혼연일체가 되어 일이 되게끔 노력하여도 될까말까 한 것이 보건의료 개혁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 각 부처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제 각각인 것이다.

이대로는 아무 것도 안된다. 아니, 지금보다 더 후퇴할 지도 모른다. 무언가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공의료관련 현안 문제를 챙겨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나라가 보건의료체계에 관한 한 '야만국가'라는 오명을 씻어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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