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남성 페미니스트, 누가 있나

최재천·권혁범·권해효씨 등 맹활약

등록 2004.05.19 15:13수정 2004.05.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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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기자] 과연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남성과 페미니스트는 상호모순의 관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부자와 노동운동가의 관계 같다고 할까.

부자가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노동의 피로와 억압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경험하지 못한 남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선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억압한다는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근본적으로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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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6월 22일 딸들이 '가슴 펴고'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딸사랑 아버지 모임'이 서울 종로 느티나무카페에서 발족식을 갖고 출범했다. 이들은 "딸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평등하게 존중받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 우먼타임스

그러나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남자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긴 의식화 과정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또 남성중심사회의 '내부고발자'들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소중하다. 혼란의 페미니즘 정착사에서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까닭이다.

1960년대 민권운동과 함께 제2의 부흥기를 맞았던 서구의 페미니즘은 1980년대에 들어 대학 여성학과의 이론연구와 고정희·김정란·김승희 시인 등의 문학으로 소개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 담론화를 거친 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일부 남성페미니스트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존재는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소중한 사례다.

비록 가부장적 신사도와 페미니스트를 혼동하는 '얼치기 남성페미니스트'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라해도 소수의 남성페미니스트들은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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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양성 공통관심사 페미니즘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Feminism)은 양성평등을 해치는 모든 억압적인 제도와 관습을 해체하려는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생물학적 성(性)에 따라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거나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오류다.

또한 칼 융이 주장하듯, 남성에게는 51%의 남성성과 49%의 여성성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100%에 가까운 젠더를 강요하는 제도와 관습은 여성의 적만이 아닌 남성의 적이기도 하다. 즉 여성주의는 법적, 제도적, 관습적, 문화적으로 조화로운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필요한 남녀 공통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 같은 논리를 배경 삼아 남성페미니스트를 찾아본다면 결코 적지 않은 남성들을 거론할 수 있다. 또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페미니스트는 존재한다. 페미니즘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국내 남성페미니스트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최재천(현 <우먼타임스> 편집위원) 서울대 교수와 권혁범(<우먼타임스> 편집위원 역임) 대전대 교수, 정유성 서강대 교수다.

최근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선정한 청소년의 바람직한 과학자상이 되는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최재천 교수는 호주제의 생물학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여성주의자들의 환호를 받은 인물이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라는 책을 통해 남성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 최 교수는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의 요청으로 제출한 '호주제의 근간이 되는 부계 혈통주의에 대한 과학자의 의견'에서 "전통적으로 남자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우리 족보와는 달리 생물학적인 족보는 암컷, 즉 여성의 혈통만을 기록한다. 부계 혈통주의는 생물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할 수도 없다"는 주장을 폈다.

최 교수는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을 사회적 억압의 근거로 삼아온 남성중심 사회에 오히려 생물학적 논거로 여성주의를 옹호한 탓에 수많은 사이버 테러를 당한다.

'딸사랑….', 'MenIF(Men in Feminism)' 등 모임 활동 활발

<말>지에 기고한 칼럼 '남성깨기'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을 통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밝히고 사회모순을 고발한 권혁범 교수는 진보 진영과 페미니즘 진영의 불화에 대해서도 정공법적인 논리를 폈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페미니즘 이슈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공이 있다.

정유성 서강대 교육학과 교수는 여성학계의 흔치 않은 남성 페미니스트로 이론 연구와 언론 등을 통한 페미니즘 확산에 기여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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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폐지 홍보대사로 활동중인 권해효씨의 국회앞 1인시위 모습 ⓒ 우먼타임스

2002년 6월 발족한 '딸사랑 아버지 모임'도 중요한 남성페미니스트 집단이다. 친 여성주의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 모임은 가정에서 부부간, 부모자식 간 평등과 평화를 실천하는 모임이다. 남성학 연구자이기도 한 이 모임의 정채기 공동 대표는 "남성들이 전근대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모임의 목표가 있다"고 설명한다.

영화배우 권해효씨는 여성단체의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하며 호주제 폐지를 위해 앞장서고 있고, 동성애자 탤런트인 홍석천씨도 안티미스코리아 대회의 사회를 보는 등 현장에서 활약해 왔다.

또 여성부와 한국여성개발원 등에서 양성평등에 기여해 온 공무원과 학자들도 있다. 현정택 초대 여성부 차관, 김원홍 한국여성개발원 법·정치연구부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

이밖에 <남자의 탄생>의 저자인 전인권, 퀴어아카이브의 서동진씨 등과 페미니즘 웹진 <언니네>의 동호회 '귀띔'에서 출발해 진보매체 등을 통해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모임 MenIF(Men in Feminism) 등도 소중한 면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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