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6) 고구마 모종을 내고서

등록 2004.05.23 21:40수정 2004.05.2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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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아무나 짓나?


비가 그친 다음날이 마침 안흥 장날이라서 고구마 순을 다시 사다가 곧장 텃밭에다 모종을 내었다. 앞집 노씨가 비닐이 덮인 두둑에 꼬챙이로 비스듬히 구멍을 낸 후 거기다가 고구마 순을 넣으면 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네 골을 심자 그새 날이 어둑했다. 이튿날 아침 텃밭에 나가보니 어제 심은 고구마 순이 시들했다. 나는 속으로 ‘하룻밤 사이에 뿌리를 내릴 수 있나, 며칠 지나면 뿌리가 내리겠지’라고 생각하며 예사롭게 보냈다.

그날 해거름 때 다시 텃밭에 가 보니, 가지나 고추 호박 모종은 다 괜찮은데 고구마 모종이 영 말이 아니었다.

a 시들한 고구마 순

시들한 고구마 순 ⓒ 박도

시든 정도가 아니라 아주 곯아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옆집 작은 노씨 부인이 와서 하는 말이, 고구마는 모종을 내기 전에 물을 듬뿍 줘야하고, 모종을 낸 뒤는 꼭꼭 다져야 하며, 둑을 흙으로 덮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챙이로 낸 구멍에다 고구마 순을 넣고 살짝 누르기만 했다. 그냥 쉽게 뿌리를 내리려니 생각하고 대충 심었다. 곰곰 생각할수록 내 처사가 몹시 미웠다.


시들시들한 고구마 순을 보니까 그만 미안해서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 못하는 생물이지만 고구마 순이 햇살에 얼마나 목마르고 내 처사를 못마땅히 여겼을까? 그야말로 백면서생이 뭘 안다고 농사일에 나서나?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한 소리하고는 지금이라도 살리자고 했다. 앞집에서 물뿌리개를 빌려다가 고구마 순에 물을 주자 모종 낸 자리가 쑥 내려갔다. 거기다가 아내가 일일이 모종삽으로 흙을 북돋아 덮었다.

며칠이 지났다. 옥수수도 콩도 대지를 뚫고 싹이 파릇하게 돋았다. 하지만 고구마 순은 여태 그날 그 상태다. 한 번 잘못낸 모종은 파릇파릇 살아나지 않았다. 두 노씨 부인은 곧 시들한 뿌리에서 새 순이 돋을 거라면서 좀 더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했다.


흔히들 할 일 없으면 ‘땅이나 파먹겠다’고 한다. 농사일을 쉽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본 바로는 결코 이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거다. 남이 하는 일은 다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해 보면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 않다.

a 대지를 뚫고 나온 파릇한 옥수수 싹이 마냥 귀엽다

대지를 뚫고 나온 파릇한 옥수수 싹이 마냥 귀엽다 ⓒ 박도

오랫동안 야당생활을 하던 정치인이 집권을 대비해서 공부도 않고 비판만 하다가 막상 자신이 정권을 잡아 나라 살림을 맡은 후 시행착오로 나라 살림을 엉망으로 망쳐놓은 일도 경험한 바 있다.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그 일이 쉬워지려면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뒤 몸에 익어야 한다. 아니면 애초부터 연습을 많이 하거나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지난해 정초부터 이제까지 이어서 나는 한 잡지에 다달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어떤 분야의 명인이나 대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평생 같은 일을 해도 매번 쉽지 않다고 한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일은 변화무쌍하기에 더욱 더 그렇다고 한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 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만 하리라


조선 후기 때 장만이라는 가객이 '참된 삶'의 어려움을 노래한 시조 한 수다. 문인의 길도, 무인의 길도 어렵다는, 그래서 초야에서 밭갈이만 하겠다는 노래다. 그런데 밭갈이도 만만찮다.

밭갈이보다 풍파나 구절양장보다 더 험한 게 인생길이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조심하고,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두 눈 부릅뜨고 보고 배워야 내 인생 길을 그나마 바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시장에 그 흔한 고구마 한 알 농사도 나에게는 마냥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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